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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동방신기의 서(東邦晨記之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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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동방신기의 서(東邦晨記之 序)


동방신기의 서(東邦晨記之 序)


1.


  스승님이 처음으로 모험을 떠나셨던 그날의 하늘은 무슨 빛깔이었을까? 내 주변의 사람들은 한 번쯤 직접 전해 들었을 그 이야기를 난 단 한 번도 스승님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들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스승님의 모험담은 수 세대에 걸쳐 전해지며,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 다른 말로 전해지고 활자로도 남겨졌는데, 난 스승님의 지척에서 수발을 들고 배움을 구하며 지냈으면서도 그 이야길 직접 스승님을 통해서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매번 홀로 상상해볼 뿐이고, 누군가가 기록해둔 스승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몰래 의심을 해볼 뿐이었다. 툇마루 안쪽으로 햇살이 깊숙이 들어섰다. 포근하다 못해 공기가 뜨거운 날씨다. 처마 끝의 풍경이 바람에 따라 울리자 나의 상상력도 따라서 너울거린다. 아니, 스승님에게 첫 번째 모험이라 할 만한 경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출생이 남다르셨으니 처음으로 눈을 뜨고 세상을 보셨을 그 순간부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록에 따르면, 햇살이 따가운 정도였다고 하니 필시 때는 초여름이었으리라. 하늘의 빛깔은 짙은 푸른색이면서도 흩어진 구름조각 덕에 한없이 높아 보이지 않았을까? 몸이 노곤해진다. 스승님께선 내게 다른 일은 말고 청소나 부지런히 하라하셨다. 법구경, 법화경도 필요 없고, 이야기책이나 한보따리 풀어놓고 질릴 때까지 읽고 있으라하셨다. 기다리지 말고 때가 되면 알아서 챙겨 먹고,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있으면 분명, 금방 돌아오신다고 하셨다. 그렇게 홀로 사원을 떠나신지 벌써 수 세기다.

  솔직히 이제는 스승님의 얼굴도 가물가물해졌다. 나의 키는 스승님을 처음 뵈었을 때보다 무려 두 배 가까이나 커졌다. 그 덕에 옷을 몇 차례나 덧대고 품을 새로이 넓혀 맞춰야 했다. 그러다 몇 차례 사원 주변을 관리하던 이도 바뀌게 되고, 시주(施主) 받던 음식마저 끊기게 되었어도 스승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이따금씩 들리는 풍문으로는 동방(東方)의 어느 작은 반도에 머무르시며 인간들 사이에 섞여 인간 노름을 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그 노름이 대체 얼마나 재미있으셔서 신선들 명부가 몇 차례 뒤바뀔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시는 걸까?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이따금씩 발아래 세상으로 고개를 내밀어 인간들을 훔쳐본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조금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이런 나를 달래어 주는 것은 스승님이 가져다주신 인간 세상의 책들이었다. 정말 인간들이 책에 적힌 것처럼 사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썼다는 사실 하나가 위안이 되어서 스승님 말씀처럼 읽고 또 읽었다.

  헌데, 책들도 나의 스승님만큼이나 오래된 터라 군데군데 귀퉁이가 헤지고 좀이 슬어 활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도 많았고, 활자의 형태가 바뀌어 문장 전체가 모호해진 것들도 많았다. 예를 들자면, 어떤 나라의 말은 원래 조사가 중의적으로 많이 쓰이는데 동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문장이 통째로 모호해져 문단 전체까지 난해해진 경우다. ‘톰이 엘리자에게 사랑을 주었다’로 읽어야 맞는 문장인지 ‘톰은 엘리자에게 사랑이 되었다’로 읽어야 맞는 문장인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된 경우. 그럴 때마다 깎아지른 듯한 모호함의 절벽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한 문장을 넘어 한 문단을 읽고, 때로는 몇 쪽을, 때로는 한 장(章)을, 때로는 이야기의 끝까지 다 읽어내려도 어슴푸레 짐작하는 정도로만 그치게 될 뿐, 결국 나는 스승님의 그림자를 좇으려다 인간도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둔 이야기 속에 갇혀 몇 날 며칠을 존재하지도 않은 망령들만 쫓아다니다 되돌아오는 것이다. 오늘처럼.


2.


  스승님의 부재 덕에 톰이 엘리자를 사랑했든, 엘리자가 톰을 사랑했든, 인간들이 사랑과 인연을 중시하고 선(善)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만큼이나 부(富)와 명예(名譽)에 대한 갈망과 욕망이 어마무시하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다. 문제는 여전히 스승님이 돌아오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다. 오늘만 하더라도 사원 안을 쓸고 닦고, 참을 먹고,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다시 또 따온 과일들을 손질하고 있는 중인데, 스승님은 어떤 기별도 없으시다. 이미 오늘도 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스승님의 소식을 접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구 년하고 오 개월에 열흘이 좀 못되었을 때다. 사실 처음부터 스승님의 제자가 되고 싶단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스승님은 본인의 힘으로 다 이루셨다고는 하시지만, 이미 누가 보더라도 단연 돋보이는 이력을 지닌 분이셨다. 신선으로부터 배움을 구한 것을 시작으로 도술을 익히시고 천계(天界)와 명계(冥界)를 제 집처럼 드나드셨고, 상제(上帝)님과 그분의 투신(鬪神)들과도 드잡이를 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경지를 진즉에 이룬 분이셨던 것이다. 오히려 스승님에게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배워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 건 그분이 일방적으로 내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하신 뒤부터였다.

  와그작.

  스승님이 그 귀한 반도(蟠桃)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한 입 베어 물자 사방에 복숭아꽃향기가 진동을 했었다. 내 입에서도 자연스레 군침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고, 곁에 서서 상제님의 말씀을 전하던 사자(使者)도 고개를 뒤로 돌렸지만, 군침을 넘기는 소리까지 감추지는 못했었다.

  내 어릴 적엔, 대체 이게 무슨 대단한 맛이라고 그리도 생각 없이 게걸스레 먹어치웠을까?”

  그날,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흔들림이 없었던 건 정작 반도(蟠桃)를 베어 물었던 스승님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귀한 천도복숭아를 대충 스윽스윽 닦아서는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놀라 고개를 가로 흔들며 손을 내저었고, 지켜보던 사자(使者)도 놀라 다급한 김에 스승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귀한 재산이라고 한다지만, 이것도 다 먹는 것이다. 악한 것들, 모자란 것들에게 넘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제자에게 사탕 한 쪽 주는 심정으로 챙겨주겠다는데 왜들 이리 법석이냐? 무명(無名)아, 알아들었으면 꼭꼭 씹어 먹어라.”

  “그렇다고는 하시지만, 서왕모(西王母)님의 반도(蟠桃)입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그저 상제님의 뜻을 전하고자 해서 온 것이지 지금과 같은 이런…”

  “근데, 굳이 뭘 더 이야기하겠다는 것이냐? 지금 네가 왔다는 건 상제께서는 이제 하늘을 비우시겠다는 것일 텐데, 지금에 와서 이딴 복숭아 한 쪽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게냐?”

  스승님은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사자(使者)를 윽박지르면서도 눈매는 자상하게 하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내가 반도(蟠桃)의 마지막 씨까지 다 발라 먹을 때까지 스승님은 사자(使者)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

  “솔직히 말하여라. 이미 상제께서는 북국의 오로라 계단을 밟고 무극(無極)으로 넘어가시지 않았더냐?”

  “…네, 맞사옵니다.”

  “그럼, 더 열이 받는구나. 상제께서 떠나시면서 너를 내게 보내신 건 뒤를 부탁함이신데, 뭐? 네가 감히 내게 이깟 복숭아 하나를 따 먹지 말라고?”

  “아, 아니옵니다. 고정하시옵소서! 상제님이 뜻을 정확히 전하라 하시어 제가 온 것이옵니다. 상제님은… 이제 누구도 천계(天界)에 굳이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무극(無極)으로 넘어가길 원하신다 하셨습니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이렷다? 그럼, 넌 관세음보살님께도 들리고 오는 길인 게냐?”

  “네, 그 분도 이미 상제님과 함께…”

  “뭣이라!”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사자(使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승님은 괴성을 내지르셨고, 그 일갈에 천궁(天宮)이 요동치고 일대의 구름이 죄다 말라버렸다. 그러자 천계의 모든 신선(神仙)들이 그때부터 너나 할 것 없이 앞을 다투어 스승님의 앞으로 달려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불신(佛神)의 경지에 이르러 대자대비하신 분께서 이토록 진노(眞怒)하시니, 저희가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용서? 너희는 진정 너희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고 용서를 구하는 게냐?”

  스승님이 손을 내뻗지도 않고 노려만 보았는데, 두어 명의 신선이 갑자기 뒤로 나자빠졌고, 다시 또 두어 명의 신선이 내동댕이쳐졌다.

  “땡중보다도 못한 것들! 따지고 보면, 네 놈들이 이 무릉도원에서 도만 닦고, 인간들은 뒤로 내팽개쳐두었더니 일이 이 지경이 된 거 아니더냐? 응? 알고 보면, 네 놈들 때문에 상제(上帝)도 삐쳐서 무극(無極)으로 도망간 거 아니냔 말이다! 비켜라, 지금이라도 당장 나부터 손을 써야 상제 놈이 돌아오지. 아니다, 잠깐. 오호라, 이제 보니 천계에서 무위도식하며 얼쩡거리고 놀던 것들 중에서 신선(神仙) 나부랭이들만 여기에 와있구나. 정단사자(淨檀使者), 금신나한(金身羅漢), 팔부천룡(八部天龍), 이것들은 지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냐? 탁탑천왕(托塔天王) 놈과 그 아랫것들도 이미 죄다 도망간 것이더냐?”

  스승님의 호통은 점점 더 크게 울리기 시작해서 천계 구석구석까지 그 소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천궁이 흔들리다 못해 축이 틀어졌으며, 천계로 올라오던 혼백들은 놀라서 명계(冥界)로 달음박질을 쳤다.

  “나는 지금 당장 무극(無極)이 아니라,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겠다! 상제에게 똑똑히 전하여라. 내가 직접 인간들을 다시금 교화(敎化)시키겠노라고!”

  돌이켜보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스승님의 도력. 그것을 직접 눈으로 봤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붉은 빛이었던 스승님의 눈빛은 붉다 못해 타오르는 듯 했고, 갑작스레 커진 덩치는 산 하나를 손바닥 안에 쥐고 놀만큼 커져버려서 오히려 현실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몰아쉬는 숨소리 하나 만으로 별을 얼려버리는 압도적인 힘. 그 무지막지함 앞에서 나의 상상력은 매끈하게 절단되었다. 나 역시도 열심히 수련하여 저런 도력을 쌓고 싶다거나, 도술을 익혀 스승의 흉내라도 내보고 싶다는 생각 따윈 꿈조차 꿀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주변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마다 스승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그때까지의 나는 알지도 못했던 스승님의 지난 이력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떻게 불신(佛神)의 신분이 되셨는지, 어떻게 여러 투신(鬪神)들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시는 것인지, 듣게 되고 읽게 될수록 내가 직접 모시며 대했던 스승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결국, 날이 갈수록 답답해지는 마음에 평소 스승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셨던 천계의 수문장, 금신나한(金身羅漢)님을 찾아가 뵈었고, 나는 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사형? 인간들을 마주하였을 땐, 살아있는 부처. 나와 있을 땐, 세상에 둘도 없는 개구쟁이. 적? 사형에게 적수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느냐? 사형은 늘 피칠갑을 한 상태로 돌아다녔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피로 옷을 더럽힌 적이 없었단다.”


3.


  사실 그때까지 나는 스승님과 금신나한(金身羅漢)님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 두 분의 사이가 각별한 이유가 단순히 스승님의 취미생활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스승님은 특이하게도 다른 불자(佛者)나 불신(佛神)들과는 달리 평소 참선과 명상 같은 걸 전혀 않으셨다. 그저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거나, 나를 끌고 산책을 하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천계 입구로 내려가 죽어서 천계로 올라오는 혼백(魂魄)들을 관찰하시는 것이 일상의 전부이셨다. 자연히 천계의 수문장인 금신나한(金身羅漢)님과 마주칠 일이 많으시니 절로 정이 들어 친해지신 것이리라 혼자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형이 네게 정말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셨구나. 사형과 나, 정단사자(淨檀使者) 사형과 팔부천룡(八部天龍), 우리 모두 같은 스승님을 모셨고, 함께 여행을 다녀온 사이란다. 인연의 두께로만 따지자면, 천계에 남은 무리들 중 우리만큼 오래고 질긴 인연들도 이젠 몇 없을게야.”

  “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다들 스승님에 대한 이야기는 하셔도 스승님과 함께 다니신 분들에 대한 이야긴 거의 하지를 않아서요.”

  “하하, 그야 네 스승이 보통 별난 인물이더냐? 그런 걸 보면, 이 천계의 구름을 딛고 다니는 것들이라고 그리 고상할 것도 없구나. 인물의 업적을 오래도록 기리기보단 자기네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들만 우선적으로 세습을 시키고 있으니… 쯧쯧. 이러니 네 스승이 저 혼백들을 귀히 여기시는 것이다.”

  혀를 차는 소리만큼이나 눈빛도 공허하셨다. 평소 같았으면, 눈치껏 머리만 조아리고 있었겠지만, 스승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

  “혼백을요?”

  “그래, 저 혼백들. 이제 천계로 올라와 망각의 강에서 머리를 씻고 강물을 마시게 되면, 전생의 모든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되지. 너도 오래도록 보지 않았더냐? 굳이 사형이 저 강물에서 기억을 씻는 혼백들을 위해 불경을 외우시고 자비를 내리시던 모습을…. 그것도 원래 수련을 쌓고 있는 불자들이 다 알아서 할 일이건만, 사형은 ‘희망(希望)’을 위해서라며 한사코 직접 하시곤 하셨지.”

  알고 싶어 물어본 것인데, 또 한 차례, 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희망은 또 무슨 말입니까? 대체 저의 스승님은 왜 그토록 인간들과 인간의 혼백들에게 연연하셨던 건가요?”

  그러자 금신나한(金身羅漢)님이 항요장(降妖杖)을 지팡이 삼아 눕혔었던 몸을 일으켰다. 툭툭. 몸을 덮고 있던 구름조각들이 힘없이 털려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어색한 침묵.

  나는 조바심에 금신나한(金身羅漢)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 혀까지 차가면서 말씀하시던 저 입이 이제는 도무지 다시 열릴 생각을 않았다. 굳게 다물어진 입만 쳐다보고 있자니 눈앞이 까마득해지다 못해 몸뚱이까지 아스라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어지럼증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더는 버티지 못하겠단 생각에 눈길을 돌릴 때쯤에서야 말을 이어가셨다.

  “의외로구나. 사형이 너를 따로 점찍어 두는 모습을 보고, 네 기억의 일부는 지우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나 보구나. 혼백일 때의 기억이 전혀 없는 걸 보니, 내 생각이 틀렸구나. 나도 이제는 사형의 뜻을 반조차도 헤아리지 못하겠구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승님은 처음부터 저를 따로 점찍어 두셨던 것입니까? 제가 혼백으로 천계에 올라와 망각의 강물에 머리를 담그기 이전부터 쭉 지켜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일어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일었다. 나는 스승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스승님은 처음부터 그 많은 혼백들 중 나를 고르셨던 것이다. 가부좌 한 번 제대로 틀고 앉은 적 없었던 내 머릿속에서 석가여래님의 각종 수인(手印)과 야차들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며, 예리한 칼날의 참요도(斬妖刀)가 요란스럽게 번뜩였다.

  “사형이 왜 너를 고르셨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런 것보단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 중에서 네가 아주 관심이 있을 법한 사실을 하나 알려주마. 너도 알다시피 사형과 나는 오래 전에 여행길에 올랐다. 당시엔 지금보다 훨씬 요괴가 많던 시절이었지. 길을 걷다가 발에 차이는 게 죄다 요괴였던 시절이었어.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당시의 사형이 온갖 요괴들을 다 박살을 내고 무사히 여행을 마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진실은 조금 다르단다. 당시 사형과 내가 손봐준 놈들 중에 요괴는 몇 없었어. 요괴들은 사형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어서 함부로 덤비지도 못하고, 멀리서 사형의 옷깃만 보여도 숨기에 바빴단다. 그럼, 사형의 무용담들은 다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바로 인간들이었지. 사형에게 매질을 당한 것들은 태반이 인간들이었어. 관청에서 누워 지내던 부패한 관리들, 산에 떼를 지어 살던 산적들, 물에 떼를 지어 살던 해적들. 하나 같이 악귀보다도 욕망이 넘치던 놈들. 같은 인간을 짓누르는 걸로 모자라 인간이 인간을 쥐어짜서 자신의 배를 채우더구나. 사형은 여행길에 오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런 놈들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단다. 그런 인간들을 매질하고 길을 떠날 때마다 사형의 이야기가 하나, 둘씩, 만들어지더구나. 쥐어 짜이던 그 인간들에 의해서 말이야….”

  알 길이 없어졌다, 전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목탁을 두드리듯 스스로의 머리를 두들겨본다고 한들 이젠 어떤 말도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금신나한(金身羅漢)님도 내게서 눈길을 거두고 항요장(降妖杖)을 손질하시기 시작했다. 하얀 천으로 섬세하게 손질되어지는 항요장(降妖杖). 시퍼런 반월(半月)의 날 위로 금신나한(金身羅漢)님의 흙빛 얼굴이 드리워졌다. 나의 상상력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반대편에서 살점을 베이고 피를 쏟아냈을 인간들을 떠올렸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간극이었다. 톰과 엘리제, 요괴와 인간, 인간과 스승님, 그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이 천계를 넘어 우주보다도 넓은 듯해서 현기증이 차올랐다. 뒤돌아서 가려는 나의 발걸음도 따라서 꼬였다. 털썩. 그대로 구름 바닥 위에 주저앉았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금신나한(金身羅漢)! 대문을 크게 열어젖히고, 북을 울려라!”

  일갈의 사자후(獅子吼)가 바람을 찢고, 천계의 성문을 두드렸다. 그 기세가 얼마나 우렁차고 대단했던지 주변의 열기가 삽시간에 달아올라 구름들이 증발해 짙은 안개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순식간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자, 입구를 지키던 초병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성문에 몸을 바짝 붙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달뜬 걸음으로 망루에 올랐다.

  “네놈들은 여전히 답답하구나. 기껏 몇 백 년 자리를 비웠다고 나를 몰라보더냐?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거라,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느냐?”

  휘적휘적. 사자후의 주인공이 하얀 도포 소맷자락 몇 번 휘날리자 금세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옅어지는 안개 사이로 드러나는 것은 황발금고(黃髮金笟)의 화안금정(火眼金睛). 이미 못 본지 수 세기가 지났지만, 한 시도 잊을 수 없었던 나의 스승님이었다. 얼이 빠져있던 초병들도 그제야 큰 목소리로 스승님의 등장을 알렸다.

  “투전승불(鬪戰勝佛)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님이 돌아오셨습니다!”


4.


  그 후로 꼬박 아흐레. 그동안 스승님은 도량(道場) 한 가운데 자리를 잡으시고 꼼짝도 않은 채로 천계의 모든 신선(神仙)들과 불자(佛者), 행자(行者), 사자(使者), 관리들을 차례대로 면담하시며, 밀린 공무(公務)를 수행하셨다. 그 열흘이 내겐 지금까지 스승님의 부재를 지켜왔던 지난 몇 세기보다도 더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스승님은 분명 자리로 되돌아오셨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스승님의 안위(安慰)를 위하여 다과(茶果)를 끊이지 않게 하고, 커다란 연잎으로 그늘을 만들어드리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열흘째가 되고 땅거미가 드리워질 때쯤이 되어서야 마지막 면담이 끝났다. 마지막 면담은 천계에서 가장 나이 어린 행자(行者)였다. 행자가 사원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기다렸다는 듯이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풍경이 울렸다. 나 역시도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서둘러 다과상을 치우려들었다.

  “왜 치우려드느냐?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라고 예외가 되겠더냐? 어서 앉아라.”

  순간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끝에서부터 묘한 떨림이 올라왔다. 스승님과의 대화. 이 시간을 그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상을 치우려던 손을 황급히 거두고, 무릎을 붙이고 앉아 스승님을 마주하였다. 찻잔을 건네는 스승님의 손등에 노을이 내려앉았다. 스승님의 손등을 덮고 있는 털빛이 묘하게도 노란빛이 아닌, 붉은빛을 띄웠다.

  “그래, 그간 많이 읽었더냐?”

  “네, 말씀하신 대로 부지런히 읽었사옵니다.”

  “깨친 것이 있더냐?”

  “솔직히 잘 모르겠사옵니다. 분부하신 대로 읽기는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책들은 낡은 것들이 많아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도 많았고, 읽기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그래? 그럼, 혹시 글을 써 본 적은 있더냐?”

  스승님이 나의 말을 자르고 내려다보셨다. 스승님의 충혈 된 두 눈이 더욱 붉어지셨다. 스승님의 두 눈은 세상 온갖 사악한 것과 요괴를 구별해 낸다는 화안금정(火眼金睛)의 도력을 갖춘 눈. 순간,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잘못한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도저히 스승님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따로 글을 써 본적은 없습니다.”

  “음, 어쩌면 망각의 강에 네 머리를 씻긴 건 내가 일평생 저지른 실수 중에서 가장 큰 실수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염라국(閻羅國)의 명부에 낙서를 한 건 비할 바도 안 되겠어….”

  열흘 동안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계시던 스승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펴셨다. 사위(四圍)에 한기가 내려앉아 어둠이 더욱 빨리 찾아들었다. 난 영문도 모른 채 급히 호롱불을 켰다. 다시 되돌아서 자리로 다가서는 스승님의 등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 너울너울 춤을 췄다.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사실 며칠 전에 금신나한 (金身羅漢)님도 그런 이야길 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이미 과거의 제 혼백을 알아보시고 따로 곁에 두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대체 무슨 이유로 곁에 두시고도 지난 몇 백 년 동안 제게 가르침을 내려주신 적이 없으십니까?”

  스승님은 대답 대신 찻잔을 비우셨다. 스승님의 눈가에 어둠이 내려앉아 자글자글한 주름이 사라지고 오로지 스승님의 붉은 눈동자만이 남았다. 당장이라도 어둠을 죄다 빨아들여 태울 것 같은 그 눈을 나는 감히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술잔도 아닌 찻잔을 고개를 돌려 비워냈다.

  “내가 자리를 비우기 전에, 네놈에게 책을 읽고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스승님께서 읽으라고 명하셨던 책들은 법구경, 법화경도 아니고 죄다 인간 세상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전부 인간들의 상상에 의해 허구(虛構)로 쓰인 책들이 태반이었고, 심지어 이제는 활자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모호한 내용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런 책들을 스승님이 자리를 비우신 수 세기 동안 꾸준히 읽었습니다. 덕분에 인간 세상이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고, 쓰는 말이 다르고, 풍습과 의식이 다르고, 대대손손 전하는 미덕(美德)도 다르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 뿐이었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제가 궁금했었던 건 오로지 스승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헌데, 스승님은 기별도 없이 돌아오시지도 않았고…. 저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인간들의 이야기 속에서 스승님의 그림자라도 찾고픈 심정으로 읽고, 또 읽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결국, 모두 다 인간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인간을 만나본 적조차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해지더니 목이 메고, 금세 두 무릎 위에 올려둔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스승님은 말없이 계시더니 털 하나를 뽑아 무쇠로 된 삼발화로를 만들고, 또 털 하나를 더 뽑아 곰방대를 만들어 담배를 태우셨다. 뻐끔뻐끔. 곰방대에 붉은 불씨가 피어오르고, 동그랗고 하얀 담배연기가 호롱불 앞으로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무명(無名)아, 네가 지금 이곳 천계에서 행자(行者)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근본(根本)을 잊은 듯하구나. 너도 망각의 강에서 머리를 씻었을 뿐, 네놈도 인간이었다. 인간의 혼백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5.


  곰방대에 불씨가 꺼졌다. 매캐한 담배향이 주변의 차(茶)향을 다 눌러버려 이제 어둠 속에서 남은 건 짙은 담배의 향을 두르고 앉은 스승님과 나 뿐이었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지겠구나.”

  자리를 고쳐 앉은 스승님의 목소리는 차분한 듯하면서도 왠지 모를 떨림이 묻어나고 있었다.

  “과거, 천축(天竺)에서 돌아왔을 때. 당시 석가여래님은 우리 일행들의 고행(苦行)을 높게 평하셔서 저마다에게 별칭을 하사해주셨다. 덕분에 이 몸도 투전승불(鬪戰勝佛)로 봉해져 이곳 천계와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려는 마귀와 요괴들을 벌하고, 천계의 규율을 엄히 집행하는 집행관의 임무도 함께 하사 받았다. 이후로는 너도 알다시피 천계의 모두로부터 수련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아왔다. 하지만, 무명(無名)아. 당시의 내가 원심(猿心)을 이겨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날 그때까지 불경이라고는 내 스승님의 긴고아(緊箍兒) 주문 말고는 들어본 적도 없었던 내가 감히 땡중 흉내라도 낼 수가 있었겠더냐? 나는 관세음보살님의 도움으로 이 사원을 짓고, 여기에 스스로 내 몸을 가두었단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참선을 하고, 불경을 읊기 시작했다. 몇 차례 석가여래께서 친히 오셨던 적도 있으셨다. 내가 힘을 다해 뜻을 이룰 일은 율법의 집행이며, 마귀들 토벌이라 하셨지만 나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었다. 이미 상제(上帝)님에겐 탁탑천왕(托塔天王)과 같은 훌륭한 경호원들이 있었으니 나는 어서 불심(佛心)을 갈고 닦아 나를 구제해 주신 부처님들과 스승님을 비롯하여, 사형제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신실한 불자(佛子)가 되고 싶었던 거다.”

  “그 이야기는 우연찮게 금신나한(金身羅漢)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오래지 않아서 스승님이 다시 활동을 하실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스승님은 꼬박 근 일천년간 금식하시며 기도를 하신 후에서야 사원에서 나오셨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신나한(金身羅漢)조차 모르는 이야기라는 거다. 내가 사원에 스스로를 포박했던 시간은 고작 삼백 년도 채 되지 않는다. 불경들을 한 차례 읽고, 절식(節食)하며, 묵언(默言)수행을 이어가던 중에 알게 되었다. 모든 해답이 인간들 속에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주변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여기엔 분신(分身)을 남겨둔 채 나는 인간들 속에 섞여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일 년, 이 년… 헌데, 문제가 생기더구나. 여기서는 불로불사의 이 몸뚱이가 신기할 것이 아니지만, 인간 세상에서 숨어 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세계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에 걸쳐 인간의 탈을 쓴 채 오직 도보로만 세계 각국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러다 세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되돌아오게 되었단다. 내 고향 오래국(傲來國) 화과산(花果山)에 말이다.

  당시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란 참 쉽지가 않구나. 이미 강산은 얼마간 변해있었고, 내가 비를 피해 거처로 쓰던 수렴동(水帘洞)도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단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이 아니었던 게야. 나를 미후왕(美猴王)이라 떠받치던 원숭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보이지 않더구나. 그놈들도 자자손손 번식했을 터인데, 이미 내가 없는 동안 다른 동물들에게 치여 구역을 빼앗긴 탓이었겠지. 그래서 난 대체 요즘엔 굴 안에 어떤 종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기에 내 식구들을 모두 쫓아낸 것일까 궁금하기도 해서 수렴동(水帘洞) 안으로 들어섰단다. 헌데, 참 웃긴 게 거기에 산짐승이 아닌 인간이 있더구나. 난 네 발로 땅을 딛고 다니는 것들 중 곰이나 호랑이 정도가 있을 줄 알았더니… 적잖게 당황했단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게 굴 안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 당연히 짐승일 줄 알고 내가 인간의 탈을 벗은 채로였거든. 헌데, 더 재미난 것이 그 인간이란 녀석이 내게 정중하게 예(禮)를 올려 인사를 하더란 게야. 난 어이가 없어서 아니, 시대가 변해 두 발로 땅을 딛고 다니며 인간의 말을 하는 원숭이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터인데, 어찌 너란 인간은 놀라지도 않느냐 물었더니, 그 인간이 또 재미난 이야길 하더구나. 글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지 뭐냐? 내가 이놈이 혹시 너무 놀라 실성을 한 것은 아닐까 했는데, 그때부터 말을 청산유수처럼 흘리더구나. 자기는 오승은(吳承恩)이란 작자인데, 이 부근으로 놀러와 잠시 낮잠을 즐기는 동안 꿈에서 나를 봤다지 뭐냐? 그러더니 꿈에서 본 여기로 오면, 틀림없이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술도 챙겨왔다더구나. 난 오랜만에 재미난 인간을 만난 듯도 하고, 인간의 탈을 쓸 필요도 없이 대화를 하는 것도 오랜만인지라 갑자기 신이 나더구나. 그래서 그 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셨단다.

  새삼 이런 이야길 왜 하는지조차 의문일 테지만, 너무 조바심내진 말거라. 정말 재미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녀석과 나는 그날로 당장에 헤어지기가 아쉬워 며칠을 그 굴 안에서 함께 보냈단다. 대부분 내가 겪은 모험담을 이야기하면 그 녀석이 듣고 평을 하는 식이었는데, 그게 여간 재밌지가 않았다. 천축(天竺)에 다녀왔었던 그 때의 일을 다시 떠올려본다는 건 상상조차 않고 있었는데, 막상 다시 이야길 꺼내고 보니 나도 모르게 스승님과 사형제들이 그립고, 아쉬운 것도 많아지고, 인간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더란 게지. 하여튼, 그렇게 열흘이 안 되게 굴 안에서 함께 머물며 이야기만 나누다 헤어질 때쯤 되었을 때, 그 녀석이 내 이야길 각색해 글로 써서 남겨야겠다고 하더라. 난 별 생각 없이 그리하라 했었지. 그렇게 녀석과 헤어지고 십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단다. 오래국(傲來國)을 넘어 대륙 전역에서 집집마다 나의 상(像)을 들여놓고 기도하기 시작하더구나. 이야기 하나가 퍼졌을 뿐인데 말이야….

  물론, 이 이야기만 하자고 과거를 끄집어낸 것은 아니란다. 사실 녀석과 내가 헤어지기 전에 부탁받았던 것이 하나 있었단다. 그 부탁이란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글이 다 써지면, 그 글을 이웃 나라로도 좀 알려달란 것이었어.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가 여러 사람들에게 읽혀지길 소망한다고 말이야. 어차피 한 동네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몸인지라 난 흔쾌히 그 부탁을 받아들였단다. 그래서 오래국(傲來國)보다도 더 동쪽에 위치한 작은 반도국(半島國)에 가게 되었단다.

  하, 그래,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서유기(西遊記)』란 제목이 박힌 책자를 들고 그 나라에 도착했을 때, 난 사실 그 책자를 아무에게나 던져줘도 그만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단다. 난 이미 그때의 그 변화에 꽤나 흥미진진해져 있었거든. 과연 이 나라에도 이 책자가 전달된다면, 대륙에서만큼 곳곳에 이야기가 번져나가고 나의 신상(神像)을 모시는 집들이 생겨날까? 그래서 난 아무에게나 책자를 넘길 수 없었단다. 조용조용히 그 나라에서 글 쓰는 걸로 유명세가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었지. 그래, 그러다 만나게 되었단 거다. 무명(無名)아, 너의 전생(前生)을 말이다.”


  탕. 탕.

  스승님이 화로에 곰방대를 두드려 재를 떨어내셨다. 하얀 재가 화로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의 머릿속도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다.

  전생(前生).

  단 한 번도 상상은커녕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던 것. 스스로가 혼백, 인간이었단 사실도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데, 스승님은 숨 한 번 몰아쉬시지 않으시고 이야기를 거침없이 이어가셨다.

  “그렇게 수소문하다가 찾게 된 것이 너였다. 그때의 네 이름은 허균(許筠). 제법 명문가의 자식이었고 아직 소년이라고 부르기에도 더 어릴 만큼 앳되었지. 헌데,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네 소문이 거리에 자자했단다. 생각하는 것이 유별나 나라에서 등한시하던 도교, 불교의 지식을 마구 끌어다 쓰는 것은 기본이고, 글솜씨가 좋아 붓을 들었다하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을 써 내려가는데, 그 글들이란 것이 허무맹랑한 거짓들이 태반이고, 거짓말을 참말처럼 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게 하니, 어린 나이에 학문이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굳이 가까이 두고 사귀기엔 장차 위험이 많은 아이라고.

  난 그 소문을 듣자마자 너를 찾아갔단다. 어차피 나의 도술이나 행적을 인간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다.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를 못할 것이고, 눈으로 보아도 이해 안 되는 걸 우선 의심하는 게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이 『서유기(西遊記)』를 읽고 이야길 퍼트려줄 사람은 누구보다도 거짓말에 능해야 했다. 그렇다면, 소문의 허균이란 영재(英才)만큼 제격인 사람이 없어 보였단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의 너는 내 기대와 정확히 일치했다. 내가 건네어 준 책자를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더니 아주 재미나게 읽었다고 하더구나. 그러면서 여전히 날 앞에 세워 둔 채로 바로 필사(筆寫)에 들어가려는데, 난 그 모습을 보고 또 한 차례 궁금해졌단다. 대체 오승은이나 허균 같은 인간들에겐 이 ‘이야기’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 것일까? 그리고 인간들은 왜 이야기에 취해있길 즐기고, 믿으려 하는 것일까?

  그 이후로 나는 짬짬이 네 앞에 모습을 보였단다. 널 수시로 관찰하기 위해서. 매번 다른 모습으로 변장해 네가 알아볼 수 없게 하였지.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꼭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네가 세상에 선보일 이야기는 어떤 것일지 말이야. 안타깝게도 『서유기(西遊記)』는 내 예상과 기대와는 달리 대륙에서만큼 크게 읽히지는 않았어. 그 나라의 규율 같은 것들 덕분이었지. 헌데, 그걸 확인했으면서도 네 주변을 맴돌며 기다렸어. 네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거든. 네가 훨씬 더 대단한 이야기를 쓰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걸.

  아니나 다를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단다. 네가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써서 세상에 알리더구나. 난 그 글을 쓸 때의 네 표정을 잊을 수 없단다. 결연한 의지에 찬 그 표정… 그리고 붓을 한 번씩 놀릴 때마다 읽고, 다시 또 읽던 신중함. 그렇게 희대의 소설(小說)이 탄생해서 후세에 남겨지더구나.”


6.


  스승님이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호흡을 고르셨다. 그러자 가냘프게 너울대던 호롱불이 뱀의 혀처럼 허공을 쉴 새 없이 탐하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가 마치 궁금증을 참지 못해 어서 빨리 다음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하고픈 나의 마음 같아 보여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인간(人間).

  스승님과 나 사이엔 개다리소반의 다과상 하나만이 있다. 헌데, 그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톰과 엘리제, 엘리제와 톰의 그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직접 한 번도 마주해본 적이 없는 인간. 헌데, 스승님은 그런 인간들 사이에 숨어들어가 나의 전생(前生)과 그 업적을 지켜보셨다고 하신다. 내가 전생(前生)에 소설가였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을 썼고, 죽어서도 글은 남겨져 세대를 거듭해서 읽혔다고 한다. 헌데, 왜 지금에서야 그걸 이야기해주시는 것일까? 지금의 나는 여전히 인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천계의 행자(行者)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물어보마. 인간들의 글을 읽고, 정녕 인간들에 대해 생각해본 점이 없었더냐?”

  꿇어앉은 발끝으로 쥐가 오른다. 짜릿하고 진하게 오른 통증에 발가락 끝을 꼼지락해본다. 그리고 고개도 갸웃해본다. 항상 스승님을 좇을 때마다 인간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져있었던 지난 시간들. 헌데, 그렇다고 해서 나는 정말 인간을 모르는 것일까? 꿇어앉아 혈액순환이 되지 않는 나의 하체는 그럼, 전혀 피가 돌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간 읽어왔던 그 수 만권의 책들 중에서 진실이라 할 만한 건 한 조각도 없었던가?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발가락 끝을 세워본다.

  “제가 인간들을 직접 만나 지켜본 적은 없어서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인간들 본연의 심성(心性)이 어떤지는 온통 듣기만 했던 것들이지 제가 직접 판단해볼 기회는 없었기에, 감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런 인간들이 쓴 책들에 관해서 몇 마디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만든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욕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사랑과 인연을 중시하려 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과 인연보단 부(富)와 명예(名譽)가 더 중시되고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하나같이 그런 이야기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품고 있는 욕망은 참으로 다양한 것 같습니다만, 대부분 물욕(物慾)과 색욕(色慾), 권력욕과 명예욕에 눌려 다른 욕망들은 쉽게 깨지고, 무시당하고, 경쟁이 되지 못한 채 아스러지는 것 같았습니다.”

  스승님이 빈 곰방대를 놀려 화로에 재를 떨다 말고 손을 멈추셨다. 이미 재가 떨어져 나가 텅 빈 곰방대의 머리를 보자 내 입은 절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책들에 비해 아주 적은 편이었지만, 그런 내용들도 있었습니다. 그건 인간들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는 어떤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제법 세세한 인간들의 욕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헌데, 그런 책들 역시도 최우선으로 치는 욕망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유’와‘평등’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전 그런 책들을 더 유심히 읽었습니다. ‘자유 욕망’과 ‘자본축적 욕망’들이 시시때때로 충돌하는데, 인간들에겐 그런 문제들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제도적 안전장치나 규율 같은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적어도 책에 기록된 바로는 그런 것 같았습니다. 책에 적힌 대로만 보면, 인간들은 거울만을 마주한 채 거대한 모순의 톱니바퀴를 굴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스승님께서 묵묵히 터럭을 한 줌 뽑아 허공에 날리셨다. 그러자 가냘프던 호롱불이 형형색색의 연등으로 피어올랐고, 어지럽혀져 있던 다과상이 정갈하고 맛깔나게 차려진 술상이 되었다.

  “오늘 하루는 너와 내가 계율(戒律)을 어기고 땡중이 되어보자꾸나.”


  술이 몇 순배.

  곰방대에 불씨가 다시 벌겋게 타올랐다. 허나, 이번에는 술에서 풍기는 복숭아향이 담배의 향보다도 더 짙다. 환한 오색빛깔의 연등 아래에 있자니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마저 그림자를 달고 있는 듯하다.

  “내가 인간들에게서 지난 일백 년간 지켜본 것은 서사(敍事)의 상실이었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스승님의 목소리는 낮게 차분히 깔리면서도 우울한 음색이었다.

  “서사(敍事)가 무엇이더냐? 욕망과 욕망의 충돌로 빚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또 단순히 욕망만으로는 이야기가 빚어지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가 전개되더라도 흥미가 없지. 서사(敍事)… 그건 인간들에게 있어 다채로운 가능성이자 모든 것들의 씨앗이다. 헌데, 인간들이 서사(敍事)를 잊어버렸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인간들은 모든 것들이 단순화되더니 결국 부모, 자식, 형제지간에 말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돌아보지 않으며, 기껏 만나는 상대 이성에게도 서로 간의 기억과 정서를 공유하는 바 없이 자신들의 시커먼 욕정(欲情)만을 갈구하더구나.”

  “스승님, 인간들은 원래가 이기적이었지 않습니까? 금신나한(金身羅漢)님도 말씀해 주시길, 스승님이 천축으로 다녀오실 때도 스승님이 맞서 벌하셨던 것들은 기실 요괴가 아니라, 탐욕스런 관리와 지역의 유지들이라 하셨습니다. 이미 그 때가 수 세기 전의 일이었고, 인간들의 탐욕은 물질의 번영 앞에서 더욱 무성해졌으니….”

  “아니다.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당시의 인간들에겐 자신들의 욕망과 함께 그에 맞서 충돌하던 비슷한 무게의 욕망이 있었고, 그것으로도 이미 하나의 서사(敍事)가 되었던 것이다. 헌데, 지금의 인간들은 모든 개개인이 하나의 점일 뿐이다. 무명(無名)아, 점과 점은 이어지면 선이 되는 법이고, 수십 가닥의 선이 이어지고, 겹치면, 면이 되는 법이다. 헌데, 인간들이 저마다 점으로만 남으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슬프고 위태로운 일인지 아직도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단 말이더냐?

  이 어리석은 화상(和尙)아, 결국 상제(上帝)를 움직인 것이 누구더냐? 인간들이다! 우리들 역시 다 인간들의 의지와 소망으로 탄생한 존재들이다. 태초에 무극(無極)이 열리고 세상을 일으킨 것은 상제나 관세음보살님이 아니시다. 모두 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금수처럼 들판을 누비던 인간들이었다. 우린 그들의 역사(歷史), 그들 서사(敍事)의 일부일 뿐이다. 그들이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만들고, 경작을 하는 과정에서 과연 상제가 무얼 얼마나 열심히 했을 것 같더냐? 그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었을 뿐이다. 그때에는 분명, 그 기도에는 분명, 서사(敍事)가 있었지. 그들의 욕망이 순수하면서도 그 욕망이 인간들 전체를 내일로 이끌어갈 만큼 희망적인 가능성의 씨앗을 담고 있었지…. 헌데, 이젠 그런 가능성과 희망에 대한 살점들은 다 뜯겨나가고, 가냘픈 욕심만이 남아버렸어….”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스승님이 술잔을 비우셨다. 붉은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있으셨다. 스승님의 말씀대로면, 인간이 세계의 근간이며, 동시에 이 우주의 실질적 주인이었다. 헌데, 그런 높고 고귀한 존재가 지금 터무니없는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고 하신다.

  “인간들이 스스로 배를 불릴 수 있게 된 것도 그들의 욕망 덕분이었다. 그들의 기도 덕분이었고, 그들의 희망 때문이었다. 헌데, 이젠 인간 세상에서 기도가 사라졌고, 배가 확연히 부른 자와 배 껍질과 등껍질이 들러붙은 자들만이 남았다. 덕분에 인간들은 더 이상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유일한 희망은 요행(僥倖)과 꼼수다. 배가 부른 자들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걸 하나라도 덜 내놓기 위한 고민만을 한다. 거기에 서사(敍事) 따위가 있을 것 같더냐? 이젠 누구도 옆 사람을 챙기지 않고, 누구도 사랑을 하지 않으려 한다. 사랑처럼 열정을 다 하는 순간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것조차 두려워 발을 빼고 물러서고, 서로의 육체만을 더듬을 뿐이다. 거기에 서사(敍事)는 껴 들어갈 틈조차 없다. 오로지 욕정(欲情)으로만 가득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마다 연결되지 못한 채 하나의 점으로만 남아 그 자리에서 외로이 말라버린다. 배가 부른 자는 배가 불러도 정서가 말라 아귀(餓鬼)에 혼이 빨리고, 배 굶는 자는 요행과 꼼수 외엔 기댈 곳이 없어 매일 딛고 서 있는 발밑이 이미 지옥도(地獄道)다. 그러면서도 자기네들이 왜 이런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인지는 하나같이 모른다. 굶는 자들은 그저 요행을 내리지 않는 상제를 원망하고, 배부른 모든 자들을 똑같이 증오할 뿐이다. 배부른 자들 역시 자신이 쌓아올린 부와 물려받은 부를 구분할 줄도 모른 채 그저 아귀마냥 더, 더, 더! 하고 외칠 뿐이다. 인간들이 서로 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단다. 인간들의 의지가 탄탄한 실타래로, 면으로, 그 희망이 온전한 하나의 구(球)로 거듭나지 못하고, 이제… 말라버릴 일만 남았단 말이다.”

  결국 스승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고개를 얼른 돌려 술잔을 비웠다. 대체 이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승님이 눈물을 훔치시는 동안 나는 연거푸 재빠르게 잔을 비워냈다. 아무것도 온전히 알고 있는 것이 없는 내가, 인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지내온 내가, 어차피 귀담아 듣는다고 한들 단박에 알 수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전혀 모를 말들이었다.

  “무명(無名)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나는 네게 땅을 굴려 구름을 부르는 술법 따위는 고사하고, 참선(參禪)조차도 제대로 가르쳐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그딴 것들은 가르칠 생각조차 없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안이 벙벙한 이유가 스승님이 가르침을 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하셨기 때문인지, 스승님의 솥뚜껑 같은 두 손이 다음 순간 내 머리를 움켜쥐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스승님은 내가 그런 걸 분간할 틈조차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가셨다.

  “시대는 변했고, 인간들은 번영을 누리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 조물주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런 인간들이라 단순히 힘을 부려 경외심(敬畏心)만 심어줘서는 해답이 되질 않는다. 이런 인간들이라 오히려 더욱 ‘인간다움’을 자각시켜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천축으로 길을 떠났었던 시절. 내 여의봉(如意棒)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들의 피가 묻었단다. 금신나한(金身羅漢)의 항요장(降妖杖)에도 인간들의 피가 흘렀고, 정단사자(淨檀使者)의 구치파(九齒鈀)에도 인간들의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래서 얻은 것이 인간들의 두려움과 경외였다. 세월이 지날수록 인간들 사이에서 소문과 소문이 더해져 나는 더욱 신격화되었다. 수십, 수 백 개의 사당이 지어지고, 나를 본떠서 만든 조각들이 집집마다 들어섰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인간들이 내게서 차츰차츰 경외감을 거두어가더니, 결국, 내 조각상을 보고 일상에서 바른 마음으로 생활에 임하겠다고 다짐했던 인간들이 언제부터인가는 내 조각상을 보고 기도하길 자기네 주머니를 채울 돈을 달라하고, 아픈 곳을 치유해 달라하고, 드러누워 잠드는 집을 더 넓혀 달라고 하더구나. 내게 그럴 정도니 상제나 관세음보살님에겐 오죽했겠느냐? 나는 덕분에 직접 오랜 시간을 들여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민을 해야 했다.

  인간들에게 오만함이 있다는 것 정도는 너도 이제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 오만방자의 끝은 짐작도 못할 수준이다. 내가 만약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여의봉을 휘둘러 대지를 가른다면, 지금의 인간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사일을 쏘아 올려 대륙을 섬으로 만들고, 섬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경외의 대상이 되고자 분신술을 써서 군대를 만든다면, 인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웃나라에 겨누고 있던 방아쇠를 즉각 당겨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는 경외와 두려움만으로는 인간들을 막아설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들이 이 시대에선 하나같이 쓸모가 없다는 거다. 그저 불행의 씨앗이 될 가능성만 농후하다. 그러나 너는 나와 다르다.”

  스승님께서 내 머릴 감싸던 손을 놓으셨다. 휘청. 어지럼증이 일순간에 밀려왔다.

  “네가 전생(前生)에 썼던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를 아느냐? 한 나라의 잘못된 규율(規律)과 모순(矛盾)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시대의 반역(反逆)을 품었으면서도 유리처럼 투명하고 맑은 글이었다. 시대 속에서 바닥을 기어가며 살던 인간들 하나하나의 순수한 염원(念願)이 담긴 글이었다. 네가 말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갈망과 그 갈망을 실현해가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고스란히 담겨있어 당시 위정자(爲政者)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할 수 있는 글이었다. 물론, 영특했던 너는 어차피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소설(小說)로 쓰면 감시의 눈을 쉽게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인간들 스스로도 믿지를 않는 도술이야기를 불필요하게 남발하기도 했다.

  무명(無名)아, 당시의 너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소설(小說), 이야기의 힘을 말이다.”


7.


  갑작스레 상을 물리신 스승님이 앞장서 사원 밖으로 걸어 나가셨다. 갑작스레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모습에 나는 무작정 뒤를 쫓을 뿐이었다. 처마 끝의 풍경이 한차례 길게 울리고,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이 되었을 때, 스승님이 발걸음을 멈추셨다.

  “이제 그만 하산(下山)해라.”

  “네?”

  나는 그만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스승님!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씀이옵니까? 드디어 스승님을 만나 전 이제야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게 되는 줄 알았는데….”

  전신(全身)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대체 나는 왜 스승님을 기다린 것인가? 스승님은 왜 갑자기 나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시는가? 정신이 아득해질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점점 몸이 구름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아니다, 실제 구름의 바닥이 꺼져 하체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헤어지는 것인가? 나와 스승님은 이대로 이만큼의 간극을 두고 달리하는 것인가? 난 이대로 그럼, 톰이든, 엘리제든, 인간들을 만나고 수백, 수천, 수만의 간극 속에서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인가?

  “가거라. 네가 전생(前生)을 살았던, 내가 머물던 동쪽의 반도국(半島國)으로 가거라. 가서 그곳의 인간들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위기를 네가 막아서라. 그곳은 이미 인간들 스스로의 오만에 빠져 저마다 점점이 흩어진 채 홀로 외롭게 영혼들이 낡아가고 있다. 부디 새겨들어라. 인간 세상의 소설(小說)이 무엇이더냐? 결국 이야기 아니더냐? 그리고 그 이야기는 무엇이더냐? 인간들 욕망의 충돌이 아니더냐? 그리고 좋은 소설이 무엇이더냐? 읽는 이로 하여금 이야기를 욕망케 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현실에서 희망을 품게 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사랑을 꿈꾸게 만드는 것. 네가 전생(前生)에 남겼던 소설이 그리하였느니라. 내가 왜 이 사실을 알면서도 네게 숨기고 망각의 강에 네 혼백을 씻겼는지 아느냐? 네가 감히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고쳐내지 못했단 응어리를 품을까봐서다. 이미 너의 글은 세대를 거듭하며 읽히고 있음에도 네가 구하지 못한 영혼이 더 많단 사실에 좌절할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해서다. 그래서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네 혼백을 씻기며, 오늘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느니라. 네가 스스로 다시 인간들에게 관심과 흥미, 애정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길. 네가 스스로 이야기를 빚어내어 만천하의 인간들에게 들려줄 수 있길…. 다행히 넌 나의 외면 속에서도 모든 것을 스스로 익히며 잘 해주었다. 무명(無名)아,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제 좀 알겠느냐? 넌 이미 스스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거다.”

  소리쳤다.

  “스승님, 저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질 않사옵니다!”

  크게 소리쳤다.

  “스승님!”

  그 어느 때보다 악을 실어 소리를 내질렀지만, 이미 몸의 절반이 구름 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시 이번에는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소리쳐봤지만, 어느새 구원이 목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와 금세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여기에 대고 스승님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신다. 이젠 귓구멍까지 구름이 파고들어 그 인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으려 한다.

  “가거라. 가서 사람들 간의 끊어진 선들을 이어주는 글을 써다오. 그들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오래도록 기억될 그런 글을 써다오. 그리하면, 내가 너의 법명(法名)을 높고 큰 곳에서 빛나 모두가 우러러 볼 수 있다 하여 ‘경민(京珉)’으로 남기도록 하마. 그러니 내려가서는 내가 잘 찾아볼 수 있도록 아호(雅號)를 ‘문수림(文樹林)’으로 쓰고, 늘 글을 쓰기 전에 오늘의 대화를 떠올려라.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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