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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부스 단편] 환상열차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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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부스 단편] 환상열차 - 프롤로그



환상열차 - 프롤로그

 

 

그러니까 작가지만이제 글쓰기가 어렵다고요그래서 더는 글을 쓸 생각도 없다고요?”

 

하얀 가운을 입고 거만하게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앉은 남자권위가 깃든 굵은 목소리와 적당히 세월이 묻어난 주름이 하얀 가운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그를 종합병원의 과장급쯤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어려워요솔직히 어려운 정도가 아닙니다갈피를 전혀 못 잡겠어요.”

 

오랜 시간 이발도염색도하지 않아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리그런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인 맞은편의 남자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충 의사와 환자쯤으로 보이는 두 남성.

 

소재가 고갈되었다는 겁니까?”

 

둘의 대화가 이어진 건 조금 전이었나 보다찻잔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마침 딱 좋을 때다무표정한 얼굴로 저들의 대화를 엿듣기에는.

 

아니오그런 게 아닙니다소재는 차고 넘쳐요단순히 소재로만 치면하고 싶은 이야기가 지천에 널려 있어요그런데… 그걸 함부로 쓸 수 없는 세상이 되었어요이젠 소재가 흘러넘쳐도 누구도 쉽게 공감해주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겁니다다들 너무 자기 관심사에만 함몰되어 있어요그래서 시장에 남은 독자들 눈치를 볼 수밖에요그러니 완전히 그들의 입에 딱 맞게말하면서도 힘이 빠지네요완벽히 그들의 입맛에 들어맞아야 해요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감성 같은 게 아니라시장에 남은 마니아들 눈높이를 무조건 맞춰야 한다고요아니라면완전히 찬밥입니다외면당하는 정도가 아니라고요이런 세상에서는 다음을 기약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겁니다자세한 수치는 몰라도 아마 무명작가 삼백 명의 수익을 합한 값이 평범한 성인 남자 한 달의 고지서와 그 무게가 얼추 비슷할 겁니다암요그렇고말고요!”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그의 눈빛은 상당히 권태로우면서도 빈틈이 없었다때문에 그가 걸친 하얀 가운이 풍기는 권위가 실제보다 몇 배는 더 부풀어져 보였다

 

말씀을 들으니 오히려 이해가 어렵군요작가란 모름지기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닙니까그리고 독자가 읽어줘야 작품으로 남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요그런데 독자 입에 딱 맞는 글을 쓰기가 어렵다는 건 실력의 문제 아닌가요?”

 

머리를 쥐어뜯던 남자는 그대로 등받이로 몸을 눕혔다현실의 벽 앞에서 자포자기해버린 모양새를 전혀 감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맞습니다맞아요실력실력의 문제겠죠하하그래서 펜을 놓고 싶은 겁니다일반 공책 한 권보다도 못한 글을 써서 뭣하겠습니까?”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긴 다리 덕에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몸매였다

 

그럼더는 할 말이 없군요그만 가셔도 좋습니다제가 사정사정할 필요는 없죠스스로 인정할 정도이니 잘 아시잖아요당신을 대신할 작가들은아니글쟁이들은 세상에 널렸습니다제가 당장 홈페이지 게시판에 구인공고만 올려도 하루 종일 알람이 울릴 겁니다그런데 이렇게 굳이 제게 찾아와서 볼멘소리를 하는 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솔직히 시간이 너무 아깝군요.”

 

편집장님!”

 

그들은 의사와 환자가 아니라출판사의 편집장과 작가였나 보다그런데 편집장들이 의사처럼 흰 가운을 굳이 입었던가?

 

무슨 말이 하시고 싶은 건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터무니없는 웹소설 따위보다 단편이라도 시대의 폐부를 찌르는 글을 남기고 싶다보세요문수림 씨당신은 그런 역량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기회를 몇 번이나 줘도 해내질 못했잖아!”

 

편집장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않고 노골적으로 상대를 압박했다길고 흰 가운을 벗어서 멀리 책상 위로 던지고서는 목을 쥐고 있는 타이도 풀어헤쳤다하얀 가운 밑에 감춰져있던 우람한 근육이 드러났고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가 빛을 발했다작가라는 양반은 그런 편집장에게 압도당하여 덜덜덜 떨고만 있을 뿐어떤 반항도 하질 못했다

 

그냥 쓰라는 걸 써요내가 최근에 연재 기회도 줬잖아몇 푼 안 되지만올 겨울까지는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도 될 거라고그런데 왜 앓는 소리를 내는 거야난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아정말진심이야어째서 시대보다 먼저 늙어버린 자네의 문장이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자네가 말하기 좋아하는 자본주의의 병폐이봐아직까지 팔리는 책들은 배금주의 덕에 팔리는 자기개발서와 경제서적이야부자들과 유명인들의 말이라면 사골처럼 우려낸 것이라도 몇 번이고 다시 재구매를 하는 세상이라고그런데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그려낸 주인공의 모험담 같은 걸 누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역경요즘 사람들은 지랄 같은 현실로부터 도피를 원하고복수와 사이다를 원해역경 뒤에는 또 다른 고난 아니면 정신승리만 있고대신할 수 있는 건 금은보화뿐이라고 맹신하는 이들이야그런 이들의 세상이라고그런데 당신이 잘난 폼 잡고 쓰겠다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작품이 아니고 똥이잖아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돈이 부질없다는 헛소리를 하지 않나정당한 폭력을 원하는 세상 앞에서 일상에 깃든 폭력이 서늘하지 않냐는 헛소리를 하질 않나그런 걸 써서 먹히는 양반들은 따로 있어요당신도 알잖아그런 건 고상하게 메이저에서 상을 받으신 양반들만 하실 수 있는 이야기라고그리고 당신은당신의 문장은 메이저에서 상을 받지 못했고알겠어요당신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현실을 살고 싶으면잔말 말고 제가 쓰라는 걸 써오세요제대로.”

 

한바탕 쏟아낸 의사아니편집장은 몸을 돌려 다시 찻잔에 손을 댔다여전히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반면혼쭐이 난 작가는 피어오르는 찻잔의 김보다도 더 야윈 몰골이었다

 

그래도… 상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최종 경쟁작에는 늘제 이름이 있었습니다아시잖아요?”

 

권태로움만 깃들어 있던 편집장의 눈빛에 이젠 확연한 노여움이 피어올랐다거기엔 상대에 대한 멸시도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게 몇 년 전입니까십년이십 년아니삼십 년우리 나이 때가 되면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줄 아십니까다들 틈만 나면 꼴에 잠시 반짝였던 전성기만 말하거든요누구도 지금을 말하지는 않으면서 말이죠아시겠어요누구도 지금을 말하지 않아요태반이 과거를 말하고성공한 사람들은 미래를 말하죠다들 몸뚱이가 지금에 있지만누구도 지금을 말하기 싫어하고지금을 글로 읽기 꺼려한다고요그러니 당장 돌아가서 태반이 소비할 도피물환상물을 써오라는 겁니다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작가는아니문수림이라는 한 명의 남자는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입술이 깊은 동굴처럼 오므라져 입술 안에서만 소리가 울릴 뿐 밖으로 어떤 말도 새어나오지 못했다

 

이만어서 가세요문수림 씨가서 제발 좀 그럴싸하게 써오세요뇌를 빼고 읽어도 술술술 읽히게끔마지막 문단마다 자극적인 사건을 삽입하거나 떡밥을 넣어서 다음 편을 결제해서 보게끔그렇게 좀잘 좀 합시다.”

 

…알겠습니다편집장 님.”

 

작가는문수림은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한숨과 함께 방문을 닫자 문에 걸려있던 명패가 떨어졌다.

 

출판사 15번지이경민 편집장.’

 

카아악

망설임 없이 가래침을 뱉었다그러자 그의 앞으로 순식간에 하얀 바닥이 끝없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왼편에서부터 길고 긴 기찻길이 눈 깜짝할 새에 깔렸고멀리서 경적과 함께 초고속 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작가의 손에는 조금 전까지 없었던 여행 가방이 들려있었다

 

어쩌겠어이렇게 된 거멋들어지게 써주는 수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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