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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내가 다시 펜을 잡은 건 조르주 멜리에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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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내가 다시 펜을 잡은 건 조르주 멜리에스 덕분이다




내가 다시 펜을 잡은 건 조르주 멜리에스 덕분이다



1. 


  조르주 멜리에스는 나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프랑스 사람이다. 그것도 1861년에 태어나 이미 1938년에 공식적으로 유령이 된 인물이다. 소설은 우연을 용납하지 않지만, 그가 나에게 영향을 끼친 과정을 돌이켜보면, 우연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역시 이 우주에서 빚어지는 현실은 작가 나부랭이가 펜으로 긁적이는 것보다 훨씬 기막힌 우연들과 기적들로 이루어져 있나 보다.
 
  사실 조르주 멜리에스가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인지조차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내가 다시 펜을 잡게 된 보다 직접적인 배경은 미국드라마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 다음으론 흥행돌풍이 연이어 불기 시작한 한국영화들 덕분일 것이고, 차례대로 각종 케이블방송의 확대와 IPTV의 등장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좀더 세세하게 따지자면, CG나 아이맥스 따위는 내게 일절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각종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이 범람하기 시작한 건 확실히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자연히 한동안 영상문학 같은 것에 몰두하게 되었다.

  조르주 멜리에스를 만난 건 그 때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대학 졸업반 시절, 전공 수업시간에 잠시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이름이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업적과 삶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늦은 밤, PC앞에서 구글링을 하며 그를 추격하게 되었다. 구글링에 열을 올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그의 인생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아서 열을 올려 추격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업적에 비해 노출되는 자료들이 너무 적은 것 같았다. 그래서 찾기 위해서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작업 과정에서 나의 영혼과 그의 영혼이 얼마간 닮은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조르주 멜리에스. 그도 예술가(藝術家)였다.


2.


  내 나이 열여섯 무렵, 당시의 나는 마흔다섯쯤에 자살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내 나이가 스물다섯이 되던 해, 그나마 영혼까지도 악마에게 주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게 다 소설 때문이다, 예술(藝術) 때문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광적인 집착 때문이다.

  서른다섯의 시간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다시 생각을 해보면, 안될 말이다. 자살은커녕 방바닥에 똥칠 제대로 할 때까지 오래도록 살 생각이다. 영혼도 악마 따위에게 줘서 될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다시 인간으로 환생을 해야 한다. 그게 다 소설 때문이다, 예술(藝術) 같이 고매한 것은 이제 모르겠고, 아름다움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소설 때문에, 살아도 누구보다 오래도록 살아야 한다.

  열여섯의 나는 요즘말로 중2병을 앓았던 것 같다. 그것도 스물다섯이 넘도록 처절하게 앓았던 것 같다. 내 기억이, 아니, 내 정신상태가 온전해졌을 때를 기점으로 본다면, 아마도 내 나이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중2병을 계속 앓았던 것 같다. 참, 징하다 못해 끔찍한 사춘기였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철이 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여전히 열여섯의 내가, 스물다섯의 내가 스스로 멋졌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중2병을 앓았던 열여섯의 소년 이경민은 당시 ‘예술이 무엇이다’라고 스스로 정의내리지 못할 철부지였지만, 한 가지는 스스로 딱 부러지게 확고하게 믿었던 바가 있었다. 그건 ‘늙으면 추해진다’라는 명제였다. 그래서 당시의 내가 고민 아닌 고민을 잠시 해보니 마흔다섯이 자살하기 딱 좋은 나이같아 보였다. 마흔다섯. 계획대로면, 나는 이십대에 내 일생의 베스트셀러를 쓰게 될 것이고, 많은 작품 필요 없이, 딱, 그 작품 하나로 온전하게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남아로 태어나 한 평생 천수를 누리더라도 길어봤자 구십 평생일 텐데, 그 중 정확히 딱 절반만 생을 누리다 가는 것이다. 일생의 역작(力作)만을 남겨두고 말이다. 그리되면, 나의 작품들이 훗날 국어교과서에 실려 대대손손 읽혔을 때, 작가에 대한 소개글이 아래와 같이 참으로 간략한 문장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이경민. 1981년 ~ 2025년. 2000년대 초기 한국문학계에 획을 그은 천재 작가.
2000년대 이전 소설과 이후 소설은 작가 이경민을 놓고 양분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전의 문예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문체와 소설문법의 파괴를 보임.
안타깝게도 마흔다섯의 젊은 나이에 자살.
대표작으로는 소설집 『괴담』이 있다.

  스스로 이룰 것을 다 이루어 떠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젊은 작가. 그의 문학작품 앞에서 누가 그의 인생에 대해서 말하겠는가? 그보다는 온전하게 기록된 작품들만이 끊임없이 회고되어 읽히지 않겠는가? 작가의 작품과 작가의 인생을 나란히 두고 정리해보는 작가론으로 누가 요절한 이경민을 쓰려할까? 생애도 짧고, 작품의 수도 적어 비평가들도 피해갔을 것이다. 그보다는 파격적인 나의 문체가, 소설적 실험기법이, 이후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패러디, 확대 재생산될 것이다. 그래서 문장 안에서 영원불멸의 삶을, 그 호흡을, 만끽하는 영혼. 정말 그렇게 된다면, 참, 괜찮지 않을까? 다만, 열여섯의 소년 이경민이 품었던 열정과 꿈의 크기에 비해 서른다섯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열정도 그 절반이 되지 못하고, 꿈의 크기 역시 일백만 분의 일조차도 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열여섯의 나는 이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던 거다. 내가, 글을 그만큼 잘 쓰지는 못할 것이란 사실. 이십대 이후로 반쪽짜리 사랑만 해서 십여 년 가까운 세월을 절필(絶筆)하며 보내리란 사실을 말이다.

다행히 스물다섯의 나는, 내색은 않아도 사실 얼마간 스스로 눈치를 채고 인정하고 있었다. 나는, 재능이 없었다. 만인 앞에서 늘 글을 쓰는 사람, 글로 밥을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 되겠노라 수차례 이야기하며,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내심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연애를, 온전한 사랑을 못해본 내가 글을 쓴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나의 글엔 늘 큰 구멍이 뚫려 있었고, 난 그 구멍의 정체를 알면서도 채우지를 못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나 존엄에 대한 숭고함까지는 모르더라도 인간들 중 절반인 여성들조차 전혀 모른 채 글을 쓴다는 것은 확실히 죄악이었다. 그래서 악마에게라도 의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 욕망하는 바를 움켜질 수 없으니 답이 뻔한 것이라 생각했다. 스물다섯. 곧 졸업이었다. 전국대학단위의 공모전에서 한 번이라도 상을 타보고 졸업을 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이 나를 옥죄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여자를 몰랐었던 나는 여성작가들의 섬세한 문체, 탁월한 심리묘사를 접할 때마다 패배감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고, 무엇보다 여자 스스로가 주인공인 소설들 앞에서는 내가 가진 어떤 무기로도 대응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악마에게 영혼쯤이야 내주더라도 살아서, 지금, 사회로 나가기 전에, ‘젊은 작가’, ‘기대되는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내게 안겨줄 작품이 필요했다.

  우습게도 그런 생각만 했지 영혼은 팔지 않았다. 압박감에 원고를 줄줄줄 쏟아냈었고, 그게 똥이든, 된장이든, 어떤 작품이든 하나는 그래도 입상하지 않겠냐는 이상한 확률계산도 하게 되더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내에선 상을 타게 되었고, 전국단위에서는 최종 본심에 내 작품들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원하던 전국단위의 상을 타지는 못했고, 난 졸업과 동시에 십년 가까운 시간을 절필하게 된다.


3.


  아름다움은 순간이다. 사람의 일생만 두고 보아도 이십대의 처녀가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여자들 사이에선 나이가 깡패라는 말도 있다. 삼십대, 사십대 여인들이 아무리 꾸민다고 한들 이십대 여성들을 외모로 이길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젊음은 순간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그간 많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있었지만, 다들 늙었다. 멀리 클레오파트라까지 가서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당장 오드리 헵번도 한 줌 재가 되었고, 올리비아 핫세도 이제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기록’하는 것과 ‘창조’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마술사였다. 그것도 자신의 극장을 소유한 마술사. 그러니 이미 대중적인 인지도와 그럴 듯한 마술로 갈채와 환호를 받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새로운 시각적 체험이었던 ‘영화필름’에 도전할 결심을 하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최초의 영화필름을 영사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날, 대중은 아무것도 없는 흰 벽면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마차가 다니며 기차가 다가오는 충격적인 시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거기에 참석해 있던 조르주 멜리에스도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되고, 곧이어 영화로 승부를 보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중 앞에서 직접 ‘시네마토그래프’를 최초로 선보인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의 산업적 가능성을 점칠 수 없어 단순히 호기심에서 그쳤을 뿐, 영화제작은 포기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럼, 조르주 멜리에스는 어째서 결심을 굳힐 수 있었던 것일까?

  마술은 환상의 실현, 모순의 현실화가 생명이다. 칼로 몸뚱이가 잘린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무대 위에서 깨버리는 것, 날아오는 총알을 눈앞에서 잡아내고, 쇠사슬에 묶인 채 금고에 갇혀도 탈출하는 것, 그것이 마술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무대 위에서, 눈앞에서, 현실화가 되는 순간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고, 마술사에게 갈채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무대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관객들은 마술사의 트릭을 의심하게 된다. ‘순간’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조르주 멜리에스는 우수한 마술사였던 만큼 이 사실에 대해 고민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필름’은 당시를 살아왔던 본인에게 그 어떤 마술보다도 강력했을 것이다. 빈 벽면에서 말이 달리고, 기차가 다가왔으니 말이다. 아마 ‘영화’가 그 ‘순간’을 무한히 지연시켜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창작자, 마술사 본인을 관객이 절대 의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충격을 보다 강력하게 주는 것이리라. 관객들로 하여금 환상을 현실로 제공하여 온전히 믿게 하는 것. 보다 완벽한 마술, 보다 실제 같은 마술로 관객들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옭아매는 것. 그리하여, 무한에 가깝게 관객을 그 ‘순간’에 머물게 하는 것, 박제(剝製)시키는 것.

  조르주 멜리에스는 노력하는 마술사이자, 타고난 예술가였다. 결국, 1902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무려 67년이나 앞서 달나라로 여행하는 모습을 영화로 만들어 상영하였으니 말이다.


4.


  아름다움은 순간이다. 사람의 일생만 두고 보아도 이십대의 청년이 가장 멋있다. 삼십대, 사십대 남성들이 아무리 노력한들 이십대 청년의 야망, 열정과 패기, 체력을 모두 흉내낼 수는 없다. 하나가 빠져도 빠지고, 모양이 살지 않는다. 그러나 젊음은 순간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그간 많은 천하영웅들이 있었지만, 다들 늙고, 병들어 죽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세월의 풍화작용(風化作用)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들만을 찾아서 남기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싶었다.

  때문에 사랑을 해도 변치 않는 사랑을 내가 해보고 싶었고, 모두가 정상적으로 가는 길보단 다른 길이 궁금했고, 힘들고, 불가능한 싸움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와 가치들을 쫓아가기 보단 허름하더라도 나름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의 농담이 늘 그러하듯이, 무엇 하나 손에 쥐지 못한 채 십대와 이십대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의 감성들이 휘발될까 두려워 글을 썼다. 그 불가능한 것들에 도전했던 순간순간의 감성들, 아무리 애타게 사랑한들 한 여자의 배경은 될 수 있어도 그 여자의 짝은 될 수 없었던 나날들의 감성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과 희망을 모를까, 다 깡그리 폐기처분해야 했었던 날들의 감성들, 그런 감성들이 내가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모조리 다 휘발이 될까 두려워 글을 썼다.

  그러나 무엇 하나 박제시키지 못했다. 나의 단어들은 빈약했고, 문장들은 어설펐다. 타협하지 못한 채 살아온 젊은 날들이 나를 미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 덕분에, 나의 글도 미숙했다. 그저 미완(未完)인 채로 나는 대학을 졸업해야 했다.


  대학 졸업 이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일시적인 절필이 되리라 믿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글을 쓰는 작업에 있어, 기교 부리기를 좋아했다. 조금 건조하게 느껴지더라도 담백하게 문장을 이어나가도 될 부분들을 일부러 행간을 나누어 쓰거나, 붙여 쓰거나, 분해하듯이 전혀 다른 이야기들 속에 깨알 같이 곳곳에 묻어버리는 식이었다. 헌데, 정작 중요한 메시지의 깊이가 없었으니 그런 겉만 반들반들한 짓이 먹힐 일이 있겠는가? 기교를 줄이고 실질적으로 이야기의 깊이를 만들어 보자. 그래서 고전문학 작품들과 철학, 개화기 국내소설을 더 읽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버거웠다. 일반적으로 대학 4년 동안 끝냈을 작업들을 홀로 대학원에서 해나가기란 그 양부터가 쉽지 않았다. 자연스레 날밤을 뒤집어가며 과제를 하고, 책 읽기를 하나의 작업처럼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과제나 논문이 아닌 ‘소설을 쓰는 감각’이 사라질까 두려워 쉴 때마다 드라마를 봤다. 그때 만난 것이 미국드라마다.

  미국드라마는 한국드라마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게다가 인물들 위주로 그들 개개인의 욕망을 하나씩 보여주고 충돌시킨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소설의 문법과 닿아 있었다. 이건 기본적으로 남녀 주인공 한 쌍의 커플이 반드시 연애를 하며, 사회적으로도 성공해야만 하는 한국의 드라마와는 이야기의 골격 자체가 다른 문제였다. 덕분에 기교보단 깊이를 배우고자 학문에 정진하려던 최초의 목적과는 달리 눈으로 영상을 보고, 소설적 기교를 받아들이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니 당시의 나에겐 미국드라마가 좋은 교과서였으며, 동시에 감을 잃지 않게 해주는 좋은 영양소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글을 쓸 수는 없었다. 기교는 기교일 뿐,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어서 깊은 울림을 갖추지 못했던 난 펜을 놓고 있었다.

 
5.

 
  1902년.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당시 상영시간 12분짜리였던 이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인간들이 달나라로 갈 수 있는 연구에 성공하게 되었고, 소위 귀족들이 달나라로 최초의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괴물들을 만나 되돌아오게 되고, 지구에 도착해 안심하나 싶었더니 괴물들 중 한 마리가 따라와서 곤경에 처할 뻔 했지만, 괴물을 결국 물리치게 되고 모두가 행복해 하며 끝이 난다가 전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화사에서 늘 회자되는 영화이며, 영화인들에겐 교과서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백미는 연출에 있다. 당시엔 인간이 달나라로 여행을 간다는 발상에서부터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그럴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단 점에서 많은 이들이 상상의 벽을 허물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현실에서 인간이 진짜 달나라에 도착하게 된 건 그 후로 67년이나 더 지나고 나서다. 게다가 로켓이 발사되어 달의 표면에 착륙하기까지 3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러나 조르주 멜리에스는 영상에서 5분만에 로켓을 쏘아 올렸으며, 단 십오 초 만에 인간들을 달에 착륙시켰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이미 자신의 마술 극장을 보유하고 있었던 조르주 멜리에스는 무대장치와 빛을 이용하는데 아주 탁월했다. 당연히 분장을 한 배우가 무대에서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배우의 얼굴을 ‘달’로 분장시킨다는 상상을 할 수 있었고, 배우의 얼굴 외에는 화면에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검은 천을 사용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끝으로 영상의 이중노출. 고정된 두 화면이 겹치면서 다음화면으로 자연스레 전환되는 스톱모션, 페이드(fade) 효과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달이 점점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듯한 환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아주 간단히, 인간을 달나라로 보내버렸고, 현실의 많은 인간들이 그 영상을 현실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페이드(fade) 효과가 언급이 되어서 하는 말이지만, 그는 유능한 기교 연출가였다. 아니, 영화적 기술들과 효과 그 자체의 선구자였다. 엄밀히 말해서 조르주 멜리에스는 처음부터 영화제작에 몰입할 계획은 아니었다. 다만, 이 환상적인 기술을 어떻게든 마술에 접목시키고자 최선을 다했다. 정확히는 마술무대에 적용을 시키고자 여러 방면으로 탐구를 하였으며, 스스로 영사기를 들고 작동시키며, 카메라로 영상을 촬영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 그 근거로 페이드(fade) 효과기술을 터득하게 된 배경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조르주 멜리에스가 길거리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카메라 조작 실수로 카메라가 멎어버렸다. 다시 카메라를 원상복귀 시켰을 땐, 버스가 떠난 뒤였고, 영구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헌데, 돌아와 영사기를 돌려보니 분명, 버스와 영구차. 전혀 다른 두 대의 차량이었는데, 필름에서 겹쳐보였던 것이다. 다른 속설도 있다. 멜리에스가 필름을 돌리며 영사하다가 필름이 뒤엉켜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필름을 다시 손보는 과정에서 우연히 두 장의 필름을 겹친 채 영사기에 노출시켜 보게 되고, 이미지가 겹치는 효과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 모두 얼마간의 우연을 동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건 멜리에스가 한 동안 확실히 카메라 촬영과 영사기 작업에 열정적으로 미쳐있었다는 사실이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창작을 업으로 삼은 예술가답게 열정을 다했고, 자연스레 선구자가 되었다. 그가 만든 필름들은 시대를 앞서 달려 나가 연일 흥행이 되었다. 이제 그가 세상에 선보였었던 페이드-인, 페이드-아웃 같은 기교는 기본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멜리에스 역시 다른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늘 고심을 하였다. 다행히 그는 연극에 익숙했기에, 배우들을 분장시킨다거나 미니어처 등의 소품을 활용할 줄 알았다. 배우들의 분장만큼이나 기발한 것이 미니어처들이었는데, 앞서 말한 ‘달세계 여행’ 같은 경우에도 달나라로 발사된 로켓 등은 모두 미니어처들로 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이야기에 환상성을 주입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필름 ‘달세계 여행’이 미국으로 밀수출되었다고 해서 그 사실이 전혀 놀라울 것은 아니었다.


6.


  사실 소설가를 결심했던 내 나이 열여섯. 그 당시의 내가 독서량이 엄청났던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주변의 누구보다 동화책이나 위인전 등은 많이 읽었던 것 같지만, 중학생이 되어서는 청소년 권장 문학도서 등을 전혀 읽지 않고 지냈었다. 쉽게 말해, 책 좀 읽었다고 하는 애들은 한 번쯤 읽어봤을 데미안을 나는 읽지 않았고, 한 번쯤은 교실에서 돌려 읽었을 법한 무협지 작품들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 책들을 읽지 않아도 이미 초등학생 때 동양고전 ‘삼국지’를 다섯 번 넘게 읽은 몸이다. 세상 굴러가는 이치는 또래보다 눈치가 빠른 듯 했고, 데미안을 읽은 녀석들보다도 감성이 유별났다.

  그런 나도 시대의 베스트셀러는 또 읽게 되었는데, 사실 그 소설들이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확실히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와 이우혁의 판타지소설 ‘퇴마록’은 내 인생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소설들이다. 당시 무모함과 오만함만을 품고 있었던 중2병 환자 이경민은 늘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이다.

  ‘이 정도는 나도 쓴다!’

  서른다섯의 청년이 된 지금은 그래도 겸손이 뭔지 정도는 안다. 그래서 대사가 제법 달라진 편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거 비슷하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을걸?’

 
  확실히 이우혁의 자료조사에 대한 탐구심과 끈기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김정현의 일단 쓰고보자는 정신 역시 높게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그 외에는 없다. 문체는 건조하고 신선하지 못하며, 이야기의 장치 역시 평면적이다. 이야기 자체에 힘이 있어 종반부까지 읽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기본적으로 품게 되는 호기심과 감성에 지나치게 의존할 법한 소재들만을 가지고 글을 이룬다. 그래서 재밌게 읽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분명 퇴마록을 날밤 새우며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그건 당시에 그런 류의 이야기가 드물고 낯설어서다. 여전히 주인공들의 평면적인 성격은 답답하기만 하고, 결론이 뻔히 보이는 듯한 전개는 읽으면서도 하품이 나왔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의 문체나 이야기 전개방식을 흉내조차 꺼렸다. 조금 더 지나 하병무의 ‘남자의 향기’를 읽기 전까지는 작가만의 색깔이란 것에 둔감할 정도였다. 하병무의 문체는 속도감이 있었고, 몰입시키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다만, 너무 감성적이었고, 그의 소설 역시 설정 외에는 모두 평면적이었다. 그래도 한 동안 하병무의 문체를 나도 모르게 따라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된 듯하다.

  고등학생쯤이 되었을 때부터 연애시를 쓰기 시작했다. 감정의 과잉이 난무하는 글귀들을 사정없이 갈겨썼다. 때마침 원태연의 시집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아, 이렇게만 100편을 쓰면, 출판을 할 수 있는 것이구나? 그런 시들은 하루걸러 하루 만에도 만들어졌다. 정말 그대로 시간이 지나갔다면, 난 시집을 출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다행히 H.O.T와 젝스키스 덕분에 한 동안 춤에도 관심이 생겼고, 조PD와 김진표 덕에 랩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고, 슬램덩크 덕분에 농구는 짬이 날 때마다 친구들과 즐겼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시집을 완성할 수 없었고, 처음으로 사귀어 본 여자친구에게 그간 썼던 시들을 다 보여준 후로 지금은 그 추억의 글귀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흔적조차 남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그럼, 나를 진정 만족시켰던 작가들, 나를 만족시켰던 작품들에는 누가 있었을까? 대부분이 문단에 등단하여 8,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김영하가, 김연수가, 박민규가, 이기호가, 성석제가, 심상대가, 잘 썼다. 물 건너서는 파울로 코엘료가, 무라카미 류가, 잘 썼다.

  그래서 내 안에 녹이려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결과가 지금이다. 십 여년간 절필을 했음에도 조금도 달라지지 못했다. 여전히 문체는 늘어지고, 간결하지 못하며, 불필요한 사설과 잡담만이 중구난방이다. 메시지가 알맞게 자리 잡히기보단 분량 조절의 실패와 고민의 부재로 이야기는 산으로 가다가 바다에서 끝나거나, 산을 오르다가 말아버리거나 하는 식이다.

  새삼 거금을 들인 내 PC와 프린트기, A4용지와 내 글을 사전에 검열해주는 ‘내리리 십오번지’ 식구들, 매달 꼬박꼬박 출판회비를 납부해준 그들에게 죄스런 마음이 든다.


7.

 
  잠시 나와 조르주 멜리에스 외에 다른 친구 이야기도 해야겠다. 그 친구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에디슨씨다. 발명왕이신 이 분은 사실 뤼미에르 형제들보다 먼저 영화 비슷한 걸 만들었다. 키네토스코프라 불린 이 요지경은 사진을 연속적으로 이어 붙여서 만든 필름 같은 걸 돌려서 마치 화면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활동사진 장치였다. 이걸 굳이 요지경이라 부른 이유는 실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와 달리 관람자 개인이 직접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멜리에스는 이 키네토스코프를 즐겨서 봤었다고 한다. 그러니 프랑스와 미국에서 서로가 떨어진 채 살아왔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충분히 주고받은 것이다. 에디슨 스튜디오에서 밀수입 된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가 상영되었던 날에 대해 상상해 본다. 한 천재적 예술가에 의해서 탄생한 12분짜리 짧은 필름을 통해 그날, 그 장소에서, 그 필름을 봤었던 사람들은 모두 강한 영감을 얻었으리라. 이는 조금도 과장되거나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에디슨 스튜디오 소속의 에드윈 S. 포터라는 감독은 그날 이후, ‘미국 소방관의 하루’라는 극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뿐인가? 1920년대로 넘어오는 시점에서부터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기술들이 더 이상 개인의 고유한 어떤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이 되어 있었다. 그간 축적되었던 기술들이 시장에서 소비되는 동시에 많은 이들이 그 기술들을 고스란히 흡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르주 멜리에스가 전성기시절 만든 영화가 무려 530여 편이나 된다고 한다. 아쉽게도 그 530여 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조르주 멜리에스는 사실 혁신적이라 할 만한 시도를 그렇게 부지런히 해낼 수는 없었나 보다. 만들어진 영화는 그 숫자가 530이나 되었지만, 혁신적 시도는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조르주 멜리에스가 영화라는 장르의 선구자이기는 했으나, 그의 인식범위에도 한계가 있었다. 스톱모션, 페이드-인, 페이드-아웃 같은 기교적 트릭은, 반복 되서 사용되었지만, 그로 인해 서사적 충격이 배가 되는 상황이 늘 따라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최초의 새로운 것을 선보인 입장에서 또다시 더 새로운 걸 보여주기엔, 그의 고집이 그의 인식의 벽을 가로막고 있었다.

  1910년쯤 부터, 사실 조르주 멜리에스와는 다른 스타일의 영화들이 시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번 되풀이 되는 비슷한 트릭과 이야기 전개방식에 사람들이 피곤해질 때쯤,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들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당연히 멜리에스는 압박을 느끼게 되었지만, 별다른 타개책은 없었다. 천재가 한 획을 그은 후, 은막 뒤로 사라져야할 순간에 온 것이다. 물론, 그를 높이 평가할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최초의 스톱모션, 페이드 효과, 미니어처 소품 사용, 배우들의 분장, 최초의 합성영화, 최초의 공포장르영화 등 무수히 많지만, 그 수가 일백 개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만들어진 영화는 오백 개가 넘는다. 이미 어느 순간부터 선구자나 예술가가 아닌 다른 영역으로 스스로가 내려앉은 것이다.

  결국, 그는 극장을 비롯해 카메라며, 영사기를 모두 내다팔아야 했고, 세계1차대전 때는, 그의 필름들이 군화 만드는 재료로 전락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영화사의 선구자였지만, 노년엔 구멍가게 사탕장수 신세가 되는 조르주 멜리에스.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빠른 속도로 망각되어진 시대의 천재.

  그가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되는 건 1929년에 이르러서다. 이미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폐기처분하고, 사탕가게 하나에 생활을 의지하고 있던 노년의 멜리에스. 세상에 다시 나왔다고는 하지만, 다시 영화적 승부수를 띄운 건 아니었다. 그제야 자국의 영화사를 정리하던 영화인들에 의해 명예인사로 추대되어 기념잔치에 등장한 것이다. 덕분에 그나마 ‘달나라 여행’ 같은 작품들이 세상에 남겨지게 된다.


8.


  조르주 멜리에스처럼 기교부리기를 좋아하고, 장치적 충격을 좋아하면서도 말년의 멜리에스만큼이나 나는 획을 긋는 걸작이 없고, 변화가 없다. 하지만, 멜리에스는 에디슨 스튜디오에 자신의 작품이 밀수출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영상을 다루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영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려는 모든 이들이 영화의 선구자 조르주 멜리에스가 선보였던 영상마술로 인해 지금의 상상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멜리에스가 스톱모션, 페이드 효과를 쓰지 않았다면, 멜리에스가 장면을 전환하여 영상으로도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단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영상 장르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그는 죽었지만, 여전히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영상을 만들어가는 많은 이들의 사고 속에서 호흡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나 역시도 현재 무수히 많은 영상 작품들을 보며, 나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 중이다. 그의 호흡 덕분에, 그의 존재 덕분에, 나는 다시 펜을 잡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인정하지만, 나는 무능하다. 둔재라서 한 편의 완연한 소설을 위해선 반 년 이상 몰입을 해야 겨우 그럴싸한 것이 만들어진다. 덕분에 여전하다. 여전히 십여 년 전, 절필을 다짐했을 때와 지금이 다르지가 않다. 여전히 문체는 늘어지고, 간결하지 못하며, 불필요한 사설과 잡담만이 중구난방이다. 메시지가 알맞게 자리 잡히기보단 분량조절의 실패와 고민의 부재로 이야기는 산으로 가다가 바다에서 끝나거나, 산을 오르다가 말아버리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펜을 잡았다. 그건 순전히 멜리에스 덕분이다. 세상에 너무나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아졌고, 나의 상상력을, 나의 감성을, 오롯이 자극시키는 아름다운 영상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니 나도 써야 한다. 살아야 한다. 무능하기 때문에, 나 스스로가 소설이 되어야 한다. 물론, 빈곤한 나의 상상력과 물기가 없는 나의 문장이 세상의 어디까지 전이될 수 있을지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대로, 이십 년쯤은 더 휙 하고 지나가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나는 다시 써야 한다. 살아야 한다. 서른다섯의 시간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다시 생각을 해보면, 정말, 안될 말이다. 자살은커녕 방바닥에 똥칠 제대로 할 때까지 오래도록 살 생각이다. 영혼도 악마 따위에게 줘서 될 일이 아니다. 어떻게든 다시 인간으로 환생을 해야 한다. 그게 다 소설 때문이다, 예술(藝術) 같이 고매한 것은 이제 모르겠고, 아름다움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소설 때문에, 살아도 누구보다 오래도록 살아야 한다. 내 안에 깊은 울림이 자리 잡아 문장이 간결하고 명료해질 때까지. 끊임없이 펜을 놀리며 살아야만 한다.

  나의 소설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내가 문장 안에 박제되고, 모두의 뇌리 속에서 호흡할 수 있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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