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r. 여름 이불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기 쉽지만, 아기들 기억에도 남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기는 쉽지 않지. 그래서 아빠는 오늘도 고민이 적지 않았단다. 고민? 아, 그러니까 고민이란 건 대충 그런 거란다. 네가 엄마 품에 안겨서 잠들지, 아빠 품에 안겨서 헛발질을 차며 놀지, 둘 중 어떤 게 더 좋을지 생각해보는 그런 거. 모르긴 몰라도 이제 대충은 알겠지? 그래, 맞아. 아빠는 오늘도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더 재미있어할까에 대해 생각을 하느라 바빴단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접이식 간이 매트리스 위에서 몸부림을 치며 이불을 온몸으로 휘감으려는 너를 보고 나서 아빠의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는 거다. 그래, 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지, 뭐냐?
그래서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그 접이식 간이 매트리스 나라의 공주님과 관련된 이야기란다. 그러니까
그리 멀지 않은 옛날, ‘거실 대륙’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접이식 간이 매트리스 왕국의 매트리스 공주의 이야기란다.
당시 매트리스 왕국의 황제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단다. 시집갈 나이가 다 되었는데도 공주가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황제는 일부러 TV 왕자와 쿠션 왕자, 공기청정기 황태자를 왕국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기도 했단다. 혹시라도 왕자들에게 공주가 관심을 보일까 싶어서 말이야. 그렇지만, 그건 모두 황제의 어리석은 짓에 불과했단다. 공주는 그들과 몇 마디 질문을 던지고는 곧장 입을 꾹 다물어버렸거든. 질문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것도 아니었단다.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지.
“TV 왕자님은 그래서 잠들 때 어떤 자세로 잠드시나요?”
“쿠션 왕자님은 하루 동안 세수를 몇 번 하시나요?”
“공기청정기 황태자님은 쉬는 날을 어떻게 보내시나요?”
그걸 지켜보던 황제도 궁금해졌단다.
“공주야, 대체 왕자들에겐 어떤 생각으로 그런 물음을 던진 거냐? 질문들이 모두 다 다르던데, 혹시 그들 중 마음에 드는 왕자는 전혀 없더냐?”
“아버님도 참 딱하셔요. 다른 나라의 왕자들을 초대했으면서도 그들의 평소 품행이나 생각이 어떤지는 전혀 모르시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시니 말이에요.
TV 왕자는 늘 TV수납장 위에서 선 채로 나랏일을 돌본다고 합니다. 제가 만약 TV 왕자에게 시집을 간다면, 저도 TV수납장 위에서 선 채로 잠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쿠션 왕자도 그렇습니다. 늘 소파 왕국 집무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유랑하러 다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대로 씻지도 않고 다니는 날이 많다고 하니 확인을 해보려던 거지요.
공기청정기 황태자는 어떻고요. 일을 사시사철 쉬지도 않고 한다고 하더군요. 그럼, 대체 쉬는 날이 있기는 한 것인지, 귀한 휴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정도는 제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주의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한편으론 공주도 결혼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기뻤고, 다른 한 편으론 너무 깐깐하게 신랑감을 고르는 것 같아서 걱정도 되었단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고심하던 황제는 결국 거실 대륙뿐만이 아니라 이웃 나라 큰방과 작은방에까지 공개적으로 공주의 신랑감을 구하겠다고 소문을 냈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각국의 왕자들로 거실이 빽빽하게 들어찼단다. 그들 중 가장 위세가 등등했던 건 극세사 재질의 두꺼운 겨울 이불이었어.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은 볼 것도 없지. 신랑감으로 나보다 괜찮은 자가 또 있으려고?”
먼 길을 달려왔던 커피포트와 바퀴 달린 의자도 겨울 이불 앞에선 말문이 막혔단다. 겨울 이불의 덩치가 보통이 아니었거든. 평소에는 장롱 안에서 몸을 눕혀서 쉬고 있어 몰랐다지만, 새삼 기지개를 쫙 켜고 나타난 녀석의 덩치는 보통이 아니었던 거야. 뭐, 물론, 그렇지만, 공주의 물음에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어.
“겨울 이불씨는 평소 장롱 안에서 어떤 꿈을 꾸고 계시는가요? 그 꿈을 저도 꿀 수는 있는 걸까요?”
겨울 이불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문이 막혀버리는 걸 본 다른 신랑감들은 따라서 같이 기가 죽어버렸어. 저렇게 덩치가 큰 위풍당당한 청년도 우물쭈물하게 되는 걸로 봤을 땐 아무래도 공주가 여간내기가 아닐 것 같았던 거야. 그때,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여름 이불이 앞으로 조용히 걸어 나왔어. 아니, 사실은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걸어 나왔지만, 워낙 무게감이 없다 보니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오히려 여름 이불의 걸음걸이는 우아하게 보이기까지 했단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는 사시사철을 공주님과 함께 보낼 수 있답니다. 곁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불편하게 하지 않을 자신도 있죠.”
여름 이불을 본 공주는 다른 청혼자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여름 이불을 살펴보았지.
“네, 저도 좋아요. 상대가 당신이라면. 우리 오늘부터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가져도 좋을 거 같아요.”
지켜보던 황제는 뛸 듯이 기뻤어.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였어. 다른 청혼자들에게 했던 것과 달리 여름 이불에겐 따로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 공주가 불안했던 거야. 여름 이불을 배웅하고 돌아온 공주는 그런 황제의 마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해주었지.
“그는 다른 이들보다 가벼워요. 새털처럼 가볍죠. 그라면 내 무릎 위에서 한 자세로 사시사철을 보내도 전혀 부담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무게감이 없거나 존재감이 없는 것도 아니죠. 오히려 그는 추운 겨울날에도 힘을 보탤 수가 있고, 무더운 여름날에도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는걸요. 그러니 그는 일 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도 매일매일 저와 함께 있는 셈이 되죠. 그러니 저와 천생연분이지 않겠어요?
다른 왕자들과 달리 그는 전혀 부담되지 않는 남자랍니다.”
황제는 새삼 공주의 혜안에 놀라워했단다. 황제가 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아이였어. 기쁜 마음에 황제는 곧 나라 전체에 축제를 열도록 했단다. 아무래도 오래지 않아 공주가 시집을 갈 것 같았거든.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부담을 주지 않는, 성실한 멋진 신랑감에게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