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unny Valentine Day
오리온 고래밥 한 봉지에는 고래가 몇 마리 들어있을까?
신문지 위로 투하된 고래와 고래의 친구들은 그의 손에 이끌려 종류별로 줄지어 늘어서게 되었다. 그는 먼저 고래부터 그 수를 확인해 보았다. 고작 12마리였다. 오리온 고래밥에는 고래가 고작 12마리가 들어있었고, 고래와 조금도 닮지 않은 복어가 무려 26마리나 들어있었다. 그 외에 들어있는 것들은 상어와 꽃게, 오징어, 붕어, 불가사리, 거북이었으며, 그 수는 고래와 복어까지 모두 합하여 113이었다. 하지만, 고래밥이라는 이름에 조금도 걸맞지 않은 비율보다 그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던 사실은 고래나 붕어나 그 크기가 모두 동일하다는 점이었다. 고래밥 겉봉에 그려진 가슴을 당당히 펴고 있는 노란 고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과자를 하나씩 집어 그 생김새를 유심히 관찰하고 나서는 입으로 넣었다. 과자 특유의 짭짤한 맛이 그의 혀를 간질였고, 이내 그의 손은 과자 부스러기와 기름기로 범벅이 되었다. 재검사의 과정을 거쳤지만, 역시 위풍당당한 노란 고래는 어디에도 없었고, 고래는 고작 12마리가 확실했으며, 복어도 26마리가 틀림없었다. 그는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과자를 깔아두었던 신문지를 마구잡이로 찢어 손가락을 닦기 시작했다. 과자 부스러기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고, 기름기가 손가락과 신문지 사이의 마찰로 닦여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파이낸셜뉴스 2006-01-17]
[fn사설] ‘취업 않고 그냥 쉰다’는 123만명
비경제활동 인구 중 그냥 쉬는 사람들과 구직을 단념한 사람들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16일 통계청이 비경제활동 인구를 활동 상태별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그냥 쉬는 사람은 123만 8000명으로 전년보다 19.8%(20만 5000명) 증가했으며 구직 단념자는 12만 5000명으로 전년보다 24.7%(2만 5000명) 늘어나 지난 2000년 16만 5000명 이후 5년 만에 가장 많았다.
찢겨진 채 여전히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있는 반쪽의 신문. 날짜로 봐서는 한 달 전쯤의 신문이었다. 이런 경제신문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의 자취방에 몸을 눕히게 된 것인지는 그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그처럼 자취방에서 홀로 고래밥의 숫자를 세어보았을지도 모를 사람들이 123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씨이파아알.”
눅눅한 습기를 헤치고 그의 욕설이 바닥에 몸을 눕힌 신문지 위로 쿵 떨어졌다. 그의 욕설에는 꽤나 무게가 실려 있었던지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단칸방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 찰나의 정적 속에서, 그는 고래밥 겉봉에 그려진 당당한 가슴의 노란 고래에게 홀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고래밥을 사는 123만 명의 청년실업자들과 마주하였고, 그들이 하나 같이 복어보다도 못한 고래를 보고 실망하는 것을 위로해 주어야 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뜯었던 고래밥의 겉봉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노란 고래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네 녀석이 어디에 있다는 거야?
그는 웃기지도 않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과자 봉지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시작이었다. 그대로 이불에 몸을 말아 방바닥에 들러붙어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28시간 42분 51초가 지나서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 때마침 그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인생의 무게
전화를 걸다 말고 핸드폰 폴더를 접었다.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수술대에 오르기 전에 남자에게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면, 아마 남자와 그녀는 지금까지의 짐작과는 비교가 안 될, 인생의 또 다른 국면을 체험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기회를 버렸고, 앞으로도 자신의 짐작에서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 인생이 펼쳐지길 원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한 시간에 걸친 수술이 진행되었고, 그녀와 남자의 인생에 아직 등장해서는 안될 아기는 다시 인생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회복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링거병에서 영양제가 한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아래위로 흔들렸다. 간호사가 다가와 그렇게 삼십분 정도만 더 누워있으면 영양제가 다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전신마취의 후유증으로 아무런 감각도 없이 링거주사를 삼십분 동안 맞고 있는 것을 위해 의사는 수술비용에 5만원을 더 포함시킬 것을 권했었다. 그렇게 합산된 수술비용이 총 35만원이었다.
35만원.
아마 그녀가 열 달 동안 아기를 뱃속에 넣고 있기만 했었어도 35만원쯤은 쉽게 쓰였을 터였다. 어디 그뿐이었을까? 아기를 낳을 때도 몇 갑절의 출산비용이 들었을 것이고, 아기를 지금의 그녀만큼 키우기 위해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렵사리 취직한 지금의 직장에서 그녀가 출산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었을 것인가도 미지수였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고, 그녀가 홀로 감당하기엔 숨이 막힐 액수의 금액들이었고, 그 금액들로도 환산되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15만원.
반면 아기 아빠가 될 남자의 한 달 용돈은 15만원이었다. 4년제 지방대학 출신의 남자는 졸업을 한지 벌써 1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취업 시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매달 시골 고향집에서 붙여주는 15만원의 용돈으로 하루하루 끼니를 때웠고, 틈틈이 모은 돈으로 지금과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콘돔을 사기에 급급했었다. 그런 남자에게 미래란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태였고, 남자가 감당해내기엔, ‘아빠’라는 직함은 당장의 젊은 나날을 전부 걸어도 위태로운 외줄타기 인생을 벗어나지 못할 암담한 무엇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남자와 그녀의 아기는 남자와 그녀의 인생의 무게가 너무 버거웠던 관계로 스스로의 인생의 무게가 얼마인지조차 재어보지 못한 채 수술대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가 영양제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고,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점점 더 빠르게 흘러내리는 영양제처럼 그녀의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라가 망하려는 징조다?
발신자 번호를 봤다. 같은 학과 동기생 A의 전화번호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말고 폰에서 시선을 거두고, 폰을 이불 밑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그 길로 그의 침묵과 핸드폰의 외침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는 침묵하며, A의 목을 비트는 상상을 했다. 그래도 울리는 벨소리에 A의 가랑이를 있는 힘껏 걷어차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혀를 빼물고 뎅굴뎅굴 굴러다니는 A를 내려다보며 며칠 전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모두가 하나같이 졸업장 하나를 위해 대학 4년을 버렸다며 개탄을 하던 술자리였다. 그 술자리에 참석한 동기들 중 그 누구도 전공과 관련된 길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이 어려운 나라 경제를 탓하며, 안전한 인생을 살기 위해 공무원시험이나 준비해야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그의 인상이 단박에 어두워졌고, A가 제일 먼저 덤덤하게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9급도 이젠 어렵다고 하더라. 난 10급에 도전해볼까 생각 중이야. 뭐 일단 10급이라도 붙어놓고 일하면서 천천히 6,7급 준비하면 될 거 아냐? 안 그래? 어차피 한 번 붙으면 철밥통일 텐데.”
“아이, 씨팔. 나라가 망하려니 별 개 같은 경우를 다 보겠네.”
“그렇지? 이번에 10급 지원자만 87대 1이라더라! 정말 대한민국 어디로 가려는지….”
“대한민국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지. 이 병신새끼야! 4년제 엘리트 대학생들이 공무원만 파고 앉았는데, 나라가 발전하겠냐? 고급인력이 현장에 투입되어서 뭔가 해보겠단 생각은 하지 않고, 개나 소나 다하려는 공무원을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 하려는 짓거리가 뭐 하려는 짓거리인지 알기나 하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엉? 말 그대로 나라 말아먹는 소리야! 알아?”
그의 흥분에 술자리는 잠시 술렁거렸지만, 이내 곧 그 술렁거림은 고스란히 비웃음으로 변해서 그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그 비웃음의 정점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A가 입가 가득히 조롱의 빛을 띠면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나라 걱정하신다는 나리께서는 대체 어디에 이력서를 내시려고요?”
“이력서? 까는 소리하고 있네! 내가 내 인생의 오너다. 이 씹새야!”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가 주먹을 내질렀고, 그의 주먹이 A를 향해 날아가기가 무섭게 A가 몸을 틀어 오히려 그의 안면에 주먹을 내다 꽂았다.
녀석과의 화해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없을 일이다. 배터리를 뽑았다. 아무리 무진장 오래가는 배터리이고, 청명한 64화음이라 해도 이제 핸드폰은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워서 길게 하품을 풀어헤쳤다. 턱이 빠질 듯 말 듯 교묘한 하품이었다. 그렇게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니 다시 한 번 A녀석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졌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서 입에 거품을 문 채 바닥을 굴러다니는 A에게 몇 차례 발길질을 더하였다. 그러면서 또 한 차례 길게 하품을 풀어헤쳤다. 이번엔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지독한 하품이었다. 그렇게 늘어지게 하품을 하자니 안면의 근육들이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린 건지 A에게 얻어맞았던 광대뼈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그래서? 나라 걱정하신다는 나리께서는 대체 어디에 이력서를 내시려고요?’
그 순간에는 A의 물음에 주먹을 날렸었지만, 사실 그는 다음날부터 가장 정직한 답변을 온몸으로 해주고 있었다. 당장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자취방에 틀어박혀서 줄곧 무협지만 읽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여자를 만났고, 여자의 입에서 취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키스하며 달려들어 쓰러뜨리는 것으로 입막음을 하곤 했다.
갑자기 여자가 보고 싶어졌다.
핸드폰과 배터리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전원을 켜자마자 우렁차게 64화음의 벨이 울렸다.
우유와 삼각김밥, 미역국, 그리고 초콜릿.
“여기는 별일 없어요. 회사에도 별일 없죠? 일이 빨리 처리된다면, 늦어도 모레쯤에는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핸드폰을 닫고 거짓말을 멈췄다. 이제는 회사에 거짓말을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제는 남자를 속였다. 남자는 어제도 면접에 실패해서 암담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남자를 가만히 다독이며 들릴 듯 말 듯하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회사 사정으로 일주일 정도 교육받으러 가.’
전화를 끊고 얼마쯤 뒤척였을까? 링거병 안의 영양제가 비어있다. 여전히 혼자서 몸을 가누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녀는 서둘러 범죄현장을 벗어나려는 범죄자처럼 수상쩍은 비틀거림을 재촉하였다. 현관을 빠져나와 아득하게 펼쳐진 계단을 힘겹게 내려서는 그녀의 맞은편으로 한 쌍의 부부가 마주쳐왔다. 당당하게 불룩 솟은 아랫배를 내밀고 뒷짐을 진 부인과 그런 부인을 부축하는 남편이었다. 그녀가 계단 옆으로 바짝 붙어 비켜섰다. 내려서는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키를 늘이며 길고 긴 계단을 덮었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하이힐을 따라 그녀의 아랫배에 서서히 통증이 가중되어 왔다. 아프고, 아프고, 또 아파오는 그 와중에도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태어나 한 번 찾아와 본 적이 없는 낯선 동네의 골목길을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차디찬 겨울의 길바닥 위에 이대로 주저앉아 으스러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쯤, 골목의 끝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에서 작은 편의점을 만날 수 있었다.
애써 편의점을 찾아냈지만, 그녀는 진열된 상품들 앞에서 한동안 망설여야 했다. 그리고 결국, 망설임 끝에 삼각김밥과 우유를 샀다. 삼각김밥이 입안에서 퍼석퍼석한 모래알이 되어 쉽사리 삼킬 수가 없었다. 돌연 눈물샘이 고여 왔다.
그래도 말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남자와 사귄 지 4년째로 접어들고 있었고, 남자가 아기의 아빠가 된지 오늘로 8주차가 되어가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말들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녀는 우유를 들이켜 삼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차가운 우유가 모래알 같은 밥알과 섞여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우유라도 데워서 올 걸 그랬나?
순간 따뜻한 미역국과 남자의 얼굴이 겹쳐서 지나갔다. 그러자 홀로 애를 지운 ‘부도덕한 여자’, ‘막 사는 여자’라고 스스로 광고라도 할 생각이냐는 자기비판의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남자에게 아기의 존재에 대해 말했었다고 한들 남자는 지금보다 더 큰 자괴감만을 맛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기에 대한 걱정보단 자신의 콘돔이 찢어진 것이 대체 언제였는지를 떠올리려고 애쓰기만 했었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믿기가 싫을 테니깐. 그녀, 자신처럼 믿기가 싫을 테니깐. 그녀도 처음 생리를 하지 않게 되었을 땐 그저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임신테스터기를 사용할 때에만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로 그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믿기가 싫었으니깐. 하지만, 임신테스터기가 선명하게 두 줄의 빨간 선을 보였을 때,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자신의 아랫배에 가만히 두 손을 올리고 잘 잡히지도 않는 아기의 맥박을 느껴보는 것이었다.
말을 했다면, 적어도 지금쯤 남자와 함께 이런 편의점이 아닌 식당에 앉아 있지 않았을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수술 후 당분간은 출산을 한 임산부처럼 몸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던 의사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편의점 창가에 놓인 간이의자에 몸을 앉혔다. 편의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선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높다랗게 솟아오른 건물들이 만들어낸 기다란 그림자들이 골목 안을 덮어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눈에 비친 창밖의 풍경은 그대로 얼어붙어 가는 듯하였다. 거리 위엔 사람이 없었고, 외롭게 버티어 선 가로등마저 그 불빛이 힘겨워 보였다. 창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도 스며들어오는 한기에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였다. 그녀가 골목을 돌아서서 나오는 앳된 소녀를 본 것은.
가로등이 어렵사리 밝히는 노란 불빛으로 들어서는 소녀는 서늘한 한기에 맞서 무거운 걸음을 옮기면서도 두 뺨이 발그레하게 홍조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걸음걸음을 옮길 때마다 품에 안아들고 있는 짐을 한 번씩 내려다보며 살며시 웃고, 또 웃었다. 소녀의 품에 가만히 안겨있는 것은 별 다를 것이 없는 색색의 포장 재료들이었다. 아마도 소녀는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걸음마다 소녀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드는 누군가를 위한 조금은 특별한 선물인 모양이다.
가로등 불빛을 벗어난 소녀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소녀의 출입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가 편의점 안을 가득 메웠다. 천천히 소녀의 동선을 쫓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소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초콜릿이 진열된 곳이었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커졌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소녀의 머리 위 사이 천장에는 붉은 바탕 안에 하얀 글씨가 선명하게 적힌 문구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Happy Valentine Day!’
소녀와 초콜릿, 아르바이트생과 광고판,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얼룩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왼손으로 손수건을 들어 뜨거워진 눈시울을 가만히 눌렀다. 어깨가 살며시 떨려왔고, 머릿속에선 갖가지 그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두서없이 쏟아지던 수많은 그림들 중 웃는 얼굴의 그가 천천히 클로즈업 되었다.
노란 고래와 이력서
벨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였지만, 그의 여자가 아닌 도서대여점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연체료를 하루 빨리 내달라는 독촉 전화였다.
핸드폰 폴더를 접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체료는 둘째치더라도 전화의 주인공이 그의 여자가 아니었단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애정전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근래에 들어 여자의 연락이 뜸해진 것이 사실이다. 당장 28시간이 넘게 잠들어 있었을 때도 문자 한 통조차 없었다. 이제 곧 밸런타인데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여행을 가자고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주어야 정상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젖히고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해보니, 지난주에 자취방에 놀러온 여자가 또 취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때였던 것 같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달려들어 키스를 했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평소보다 다소 거칠게 그가 밀어붙였다는 것과 여자가 엄청 저항을 했었다는 정도였지만, 아무래도 그 미세한 균열이 불안함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관계를 맺은 후 네 다리가 가지런히 놓이게 되었을 때였다. 늘 그래왔듯이 그는 여자가 마치 그의 마음 속 살점이라도 된 듯한 묘한 아늑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와는 달리 여자는 등을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했었던 것이다.
‘너, 이젠 내 남자 하기가 싫은 거니? 요즘 몰골이 계속 왜 이런 거야? 넌 걱정된다면서 어떻게 면접 같은 것도 한 번 안 보냐? 아니, 너 회사 알아보고 이력서 넣어보고는 있는 거야? 이젠, 지겨워. 정말….’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갸우뚱하게 젖힌 고개를 바로잡게 되었다.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들을 들추어 며칠 전에 사두었던 이력서와 볼펜을 찾았다. 옷가지들이 들어올려질 때마다 시큼한 냄새가 함께 들어올려졌다. 결국, 온 방안이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차게 되었을 때, 방바닥에 대충 베개를 놓아 가슴에 깔고 엎드릴 수 있었다. 그래도 어렵게 이력서를 찾아낼 때와는 달리 난생 처음 적어보는 이력서였지만, 일말의 긴장감 없이 성명과 주소, 주민등록번호를 한꺼번에 아주 시원시원하게 잘도 적어 내려갔다. 뒤이어 초등학교 시절부터 몇 차례의 입학과 전학, 그리고 졸업을 적는 동안에도 문제가 없었다. 다만, 최종적으로 대학교 졸업예정일을 적었을 때, 새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노란 고래가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을 뿐이었다.
대체 똑같이 생긴 무리들 중에 당당히 가슴을 펴며 사는 노란 고래 같은 사람들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사실 기억을 오래 더듬을 것도 없이 그가 입대를 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그는 노란 고래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무리들 중에서 자신감이 있고, 내일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내일을 이용할 줄 아는 젊은이었다. 전공이든 교양이든 그에겐 학점 따위가 무게감을 주지 못했고, 영어 몇 마디 못한다고 하여서 삶이 어려워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적으려니 거기에 대해 자격증을 발부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이력서에 적기에는 그 성격이 모호한 것이라 적을 수 없을 뿐이었다.
잠시 이력서로부터 고개를 돌려 베개를 베고 드러누웠다. 천장의 연속 사방 무늬 벽지가 지워지고 이력서 한 장이 그려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이력을 빼곡하게 채워나갔다. 여자와의 이력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여자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필요했었던 자격증은 끈기와 자신감이었다. 밑천 한 푼 없어도 그것만으로 충분했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력서가 그의 군입대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그것도 잠시. 군말 없이 면회를 와주었던 여자였었다. 그길로 면회 온 여자를 데리고 바로 외박을 나갔었고, 국가를 위한 충성이 아닌 한 여자를 위한 충성을 맹세했었다. 확실히, 행복한 이력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에 놓인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기에는 적을 수 없는 이력들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몇 차례의 면회와 몇 차례의 휴가를 건너 그가 전역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건강했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환경도 그의 신체처럼 건강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업이 망한 가족들은 한날한시에 신용불량자가 되어있었고, 주변의 친구들도 카드빚에 젊음을 차압당한 상태였었다. 덕분에, 군생활을 하면서 그가 구상했었던 수많은 사업 아이템들이 결국엔 엄청난 자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었다. 그가 이력서에 한 줄 긁적여 보았다.
‘현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었던 시기임.’
정말,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었다. 든든한 밑천 없이는 판도 못 벌리는 세상. 노란 고래와도 같았던 그의 삶이 그렇게 빛을 바래고, 주변의 무리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시시한 녀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확인해본 지난 시절의 성적들은 둘째치더라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길로 함께 졸업했다고 생각했었던 영어를 다시 시작하려니 영어 알파벳이 그 시절보다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이력서를 구겨서 과자 봉지가 던져져 있을 어디쯤으로 날렸다. 천장에서는 여전히 여자와의 이력서가 차곡차곡 쓰이고 있었다. 인생항로를 항해함에 있어 무수히 뱃전을 괴롭혔던 폭풍우를 온몸으로 함께 견뎌내던 여자, 최고의 여신선수상(女神船首像). 전역을 한 이후로, 일이 그런 식으로 꼬여가자 여자를 붙들고 울고 싶어졌다. 크게 소리 내어 울면서 안겨있고 싶었다. 세상이란 것이 이토록 무서운 것이었냐고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에게 괜히 한 번 따지고도 싶었다. 네가 날 좀 안아달라고 비겁하게 구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허튼 자존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결심이 그로 하여금 여자에게 건네는 모든 말들을 아끼게 만들었다. 그것이 죄스러워 점점 마음이 무거워져갔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는 조용히 그를 위로해 주곤 했다.
여자의 위로를 받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공무원 시험은 비겁한 겁쟁이들이나 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남기지 못하는 이력의 소유자라고는 하지만, 남자라는 이름의 자존심을 쉽게 굽힐 수는 없었다. 9급 공무원시험 준비 따위는 평소 무리들 중에서는 그나마 영특하기로 소문이 났었던 그가 선택하기엔, 절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문제였다. 이미 학자금대출 등으로 나라에 빚을 지고 있는 청년실업자일망정 예전처럼 남들과 다른 신선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내서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고 싶었다. 다만, 그러려니 그의 주머니엔 먼지만 가득하였고, 영어는 너무나도 높고 가파른 정복 불가능한 성벽 같은 것이었다.
순간, 그의 인생이 빛 한 점 들지 않는 그의 자취방만큼이나 암울하게 느껴졌다. 방안의 공기를 모두 삼키고 나면, 앞으로 자신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헌데, 이렇게 무섭고 살이 떨리는 시기에 여자의 무관심이라니. 아니, 어쩌면 이대로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노란 고래 따위를 꿈꾸어 오던 자신이 더없이 가냘파 보였다. 뜯겨진 과자 봉지를, 구겨진 이력서를, 방구석 어딘가로 던져버렸던 것처럼 여자도 자신을 그렇게 내칠까 점점 더 두려워졌다.
한동안 현실에 덜덜 떨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대로 여자를 잃을 수는 없었다. 이제 곧 졸업을 하고, 취업의 난관을 넘어, 결혼의 문턱에 섰을 때, 그의 청혼을 받아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여자였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흔들리는 여신선수상(女神船首像)을 붙들어 제자리에 고정시켜둬야 했다. 여자마저 놓치게 된다면, 꿈꾸어왔던 삶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씨팔, 쫄지 마! 그래, 뭐, 내가 잘못했나? 세상이 좆같은 거지.”
불어오는 바람에 닻을 들어 올리듯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왼손을 뻗어 모자를 챙겼다. 다시 오른손을 뻗어 양말을 챙겼다. 그렇게 폭풍우가 빗발치는 뱃전으로 향할 준비가 끝났다.
기억(記憶)
그녀의 핸드폰이 남자와의 기념일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4년 전의 오늘은 캠퍼스 어디쯤에 서 있는 굵다란 플라타너스나무 밑에 웅크리고 있다. 어둠이 고개를 들어 석양을 삼킬 때쯤이었다. 겨울의 드센 바람 속에서도 여전히 손가락 끝에 잎을 달고 있었던 굵다란 플라타너스나무 밑에 그녀와 남자가 마주보고 있었다. 먼저 두 뺨을 물들인 것은 그녀였다. 숨기고 있던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대학에 발을 들여놓았었던 스무 살. 갓 전역을 했었던 남자는 그녀만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캠퍼스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던 복학생이었다. 또래의 동기생들보다 훨씬 든든해 보이는 가슴과 먼 곳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의실을 찾지 못해서 허둥댈 때에는 그 눈빛에 천진함이 묻어났었던 남자였었다.
소녀가 수십 분에 걸쳐 정성스럽게 고른 초콜릿을 계산대로 올린다. 아르바이트생은 그런 소녀를 보고 싱긋 웃어 보이며, 제품들 하나하나를 바코드로 찍기 시작했다. 소녀는 계산대에 찍히는 금액들을 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누르고 서 있었다. 아마 어렵게 맞춰온 용돈을 초과하면 당장이라도 곤란한 표정이 될 것이고, 아르바이트생은 그 앞에서 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보여야 할 것이었다. 기억 속의 그녀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계산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는 난생 처음으로 받은 월급봉투가 들어있었다. 아르바이트가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던 그 당시의 그녀가 주말 동안 식당에서 서빙을 했었다. 몇 번의 실수로 일당보다 깨먹은 그릇의 수가 더 많았었다. 덕분에 월급봉투는 배가 홀쭉했었다. 아르바이트생의 손놀림을 유심히 지켜보던 소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켜보던 그녀가 더 다행스런 마음이 들었다. 기억 속의 그녀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계산대에서 한 동안 발을 동동 굴렸었다. 결국, 최초에 생각했었던 모양새대로 초콜릿을 포장할 수는 없었다. 더욱 떨리는 마음이 되었고, 남자 앞에 섰을 때는 얼굴을 붉히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전부였었다.
어쩌면 기억은 사랑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가 주었던 선물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이 그들만의 것이라고 한껏 오해하고 있었던 그 철없던 대학시절.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늘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었다. 연애감정의 줄다리기를 지칠지 모르고 즐겼었던 연인들. 남자는 그녀의 불안함이 고개를 들기 전에 늘 한발 앞서 움직이려 하였다. 그녀가 괜스레 우울한 날이면, 마음을 달래어 줄 꽃 한 송이를 말없이 준비했었던 남자. 늦잠이라도 자는 날에는 어떻게 알았던지 모닝콜을 해주던 남자. 그녀의 일상이 그렇게 남자로 채색되던 나날이었다. 그런 나날들의 연장선 속에서 남자보다 졸업이 늦었던 그녀가 남자보다 먼저 취업을 하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심정에 취업시험도, 면접도 모두 남자 몰래 치렀는데, 덜컥, 합격이 되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확실히 기쁜 마음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괜스레 남자에게는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 혼란의 순간에 남자에게 전화가 왔었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노라고. 지금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두 손에 케이크와 꽃다발이 들려있으니 샴페인만 준비해 달라 말했었던 남자였다.
편의점을 나서는 소녀를 보며, 그녀는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그들을 얼마나 바꿔놓은 것일까? 그리고 또 앞으로는 얼마나 더 바꿔놓을 것인가? 과연 그녀가 남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전신마취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가 죽어 없어졌다는 사실을 들려줄 수는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아이가 언제부터 그녀의 뱃속에서 숨쉬고 있었는지조차 말해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단지 졸업을 하고도 여전히 취업시험에 목을 매며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너무 안쓰러웠다. 시험에 낙방할 때마다 또는 남자보다 한 발 앞서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을 대면할 때마다 남자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안아주었던 것이고, 조금이라도 남자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고자 함께 밤을 보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어지럽고 애틋한 두 마음이 만나서 그녀 뱃속에 작은 생명으로 거듭났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난해하고 무거운 문제를 지금까지 그녀 혼자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지금 당장 생각나는 무수히 많은 말들이 무엇 하나 남자에게는 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수습기간 중인 박봉의 사회초년생이고, 남자는 여전히 내일을 짐작 못할 청년실업자였다.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훔쳤다. 이제는 그녀가 남자를 위해 기억을 만들어주어야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남자의 불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이 어떠한 노력을 한다고 한들, 남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만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되는 걸 지켜보고만 있다면, 그녀와 남자의 미래를 위해 죽어간 이 이름도 없는 한 생명은 그 누구의 기억으로도 연소(燃燒)되지 못한 채 완전히 소멸될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아기의 맥박이 사라지고 저릿한 고통만이 밀려오는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이 고통, 분명히 존재했었던 희미한 맥박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남자의 곁에 흔들림 없이 있어주어야 했다.
심호흡을 내쉬었다. 어렵게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다리에 힘은 풀린 채였고, 저릿한 통증이 전해져 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초콜릿 진열대로 다가섰다. 비틀거리는 걸음마다 머릿속에서 색색의 포장지들이 스쳐지나갔고, 곧이어 4년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환히 웃고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Funny Valentine Day
좁디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리는 그의 어깨엔 통기타가 걸려있다. 걸음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왼손이 허공에서 코드를 짚어갔다. 아마 그의 발걸음이 멈추어 서게 된다면, 그건 여자의 집 앞이리라. 그리고 그녀의 집 앞에서 그는 한 차례 기타를 튕기며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이나 밴드의 반주, 코러스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면, 생목으로 라이브를 날려야하는 법. 그 후에, 여자가 집밖으로 나오건, 나오지 않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그가 여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말이다.
끝으로, 여자를 만난 그는 분명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리온 고래밥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 고래밥 알지? 거기에는 왜 물고기들이 종류별로 잔뜩 들어 있잖아. 고래랑, 상어랑, 복어랑, 붕어랑… 근데, 웃긴 게 고래랑 붕어랑 덩치가 다 고만고만하거든. 현실에서도 성적이 좋은 사람, 영어가 되는 사람, 상술이 뛰어난 사람,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 뭐, 제각각 많이 있지만, 나는 사이즈가 전혀 다른 사이즈라고 큰소리치면서 가슴 당당히 펼 수 있는 놈은 몇 없는 것 같아. 그냥, 다들 고만고만한 덩치들이 모여서 저마다 나름의 개성으로 버티고 있는 거지. 꿈? 특기? 전공? 그냥 서로 좀 다르다 뿐이고, 우린 그냥 같은 하늘 아래에서 서로서로 눈치만 보면서 경쟁하고 있는 거야. 왜냐면, 진짜 사이즈가 다들 고만고만하니까. 다들 4년제 대학졸업생이고, 다들 토익 공부하고, 다들 공무원 준비하고, 임용고사 준비하고, 유학 다녀오고, 불안해서 대학원도 다녀보고. 그러니 좀 나아봤자 그 틈에서 성적이 좀 괜찮은 정도인 거잖아? 그런 거라면, 나, 솔직히 앞으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막말로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그런데, 내가 더 눈치보고, 내가 더 노력한다는 것도 좀 웃겨. 일단 너도 겪어봐서 잘 알겠지만, 내가 어종이 특이하잖아. 그러니까 내 색깔대로 일단 열심히 해보는 거지 뭐. 어차피 고만고만한 애들이랑 계속 경쟁할 거면, 전혀 다른 길로 가보던가, 아님, 옆에 있는 다른 놈들이 실수할 때까지 버티면 되는 거잖아? 그런 거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뭐, 솔직히 내가 우리를 요만한 사이즈로 만든 세상을 어떻게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네 얼굴에 웃음꽃 피도록 바꾸는 건 전공이니까. 그러니까, 뭐, 다시 노래라도 한 곡 더 뽑아볼까?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남자와의 추억을 받침 삼아 편지를 쓰는 그녀. 스탠드 불빛이 닿지 않는 한 편에는 정성들여 포장된 초콜릿 상자가 하나 있다.
우리들의 Valentine day가 Happy valentine day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 지금 솔직히 모두들 많이 머리 아픈 상황이고, 좀 우습기도 한 모습들이니깐, Funny라고 하자. 우리들의 Funny valentine day를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