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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그녀의 편지, 쌍곡선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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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그녀의 편지, 쌍곡선을 그리다


그 여자의 편지, 쌍곡선을 그리다.




  한반도에는 3개국이 공존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군대. 이중에서 제일로 기이한 나라가 군대다. 누구든 거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왕까지 이를 수가 있다. 정치적 자질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든 시간이 이끄는 대로 신분상승의 쾌감을 맛볼 수 있다. 군대라는 나라의 폐쇄성 때문에 사람들은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로, 군인들은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만 하는 줄로 안다. 안타깝다. 군대라는 나라도 결국, 사람이 사는 나라다. 국경이 다르더라도 사람들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재미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휴가

 
  지금. 강릉에서 대구로 쾌속 질주하는 우등고속버스 안에서 불을 붙이지 않은 빈 담배의 필터를 곱씹고 있는 군인이 한 명 있다. 일병 김철민. 군복 왼편 가슴 부위에 관등성명이 멋들어지게 박혀있다. 빳빳하게 풀을 먹여 깃을 살린 군복과 얼굴이 훤히 비칠 정도로 공을 들여 닦은 전투화가 그 멋을 더해준다. 꿈에 그리던 일병 정기휴가다. 손에 쥔 라이터를 쉴 새 없이 매만진다. 옅은 파란 불꽃이 잠시 튀었다 사라진다. 이러다간 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라이터의 부싯돌이 먼저 날아가고 없을 것이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구나!’

  철민은 그녀를 떠올린다. 철민을 긴 시간 불안함에 떨게 했었던 그 여자. 철민이 고개를 돌려 흔들리는 차창을 바라본다. 강렬한 8월의 햇살을 가린 커튼이 흔들림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녀를 기다렸던 철민의 지난날도 이처럼 쉴 새 없이 흔들렸었다. 그 여자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을 때의 떨림과 입대하기 직전까지 죽어라 여자에게 달려들었던 시절의 절박함, 그리고 입대 후에도 잊지를 못해서 끈질기게 보냈었던 편지와 편지, 답장이 없는 편지에 이어졌었던 전화와 전화, 길고 긴 신호대기음. 다행히, 이젠 다 지난 일이다. 나부끼는 커튼의 레이스 끝자락을 바라보며, 그 여자의 가느다란 다리를 가리던 하늘색 레이스의 긴 치마를 떠올린다. 걸음걸음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철민을 손짓했었던 첫 만남이었다. 혼란스럽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뜨거운 가슴의 스무 살. 철민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매끈한 두 다리 뿐이었다. 그 여자의 두 다리를, 그 여자를, 마주하고만 있으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많은 잡음들이 일제히 부동자세가 되고는 했었다.

  목 뒷덜미에서부터 오소소 닭살이 피어오른다. 지난 십여 개월 동안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던 에어컨 바람이 차갑다. 손을 뻗어 커튼을 조심스레 열어젖힌다. 그러자 오, 가슴팍으로 마구 쏟아져 내리는, 햇살, 햇살. 그 빈틈없는 햇살들 틈을 비집고 한달음에 철민의 품으로 달려드는 여자를 떠올려본다. 무리한 상상이라도 좋다. 답장이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편지에 적힌 내용이 중요하다. 그 여자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던 그 비밀스런 고백이 중요하다. 지난 10여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었던 답장이 그토록 무거운 메시지를 안고 다가올 줄이야, 답장이 너무 무거워, 기분이, 좋다, 아주, 좋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본다. 이제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대한의 남아. 버스에서 내리게 될 것이고, 입에 물고 있는 빈 담배. 그 꽁무니에 불을 붙일 것이고, 긴장된 마음. 타는 갈증을 대신하여 길게 한 모금 빨아들일 것이고, 활짝 핀 가슴. 플랫폼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어회화

 
  영지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였다. 일정하게 걸음을 옮기는 초침과는 달리 버스는 더디기만 했다. 퇴근시간을 전후하여 길 위로 쏟아져 나온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고 있었다. 영지가 짧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차창 너머로 내려앉기 시작한 어둠이 신속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그에 뒤질세라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선두로 늘씬한 경량급의 차들이 구석구석 틈새를 비집고 들어섰다. 상황이 이렇다면, 볼 것도 없이, 지각이었다. 체념은 빠를수록 좋다. 영지가 가방에서 어학용 카세트를 꺼냈다.

 
Lesson Three. Whom do you want to speak with? (누구를 바꿔드릴까요?)
 
Chapter One. Listen.
 

Would you tell me your company name?
(전화거신 회사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I will take your message to call you back.
(담당자가 자리에 오면 전화하라고 전달하겠습니다.)

I will connect you to the right person.
(담당자 바꿔드리겠습니다.)

Whom do you want to speak with?
(누구를 바꿔드릴까요?)


  Lesson Three. 항상 Lesson Three가 고비였다. Lesson Four부터는 어떤 회화테이프이든 어려워졌다. 그러니 집중을 필요로 했다. 영어에는 왕도가 없다고 했던가? No pains, no gains. 영지는 노력 없이 얻는 것이 없다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Chapter Two. Listen and Repeat.

  신호등에 발이 걸린 버스가 급히 멈추었다. 차창이 흔들렸고, 손잡이가 흔들렸고, 영지가 쓴 뿔테안경이 흔들렸고, 어학용 테이프의 진도가 그 틈을 타 영지를 앞질러 저만치서 손짓을 했다. 되감기. 한 문장이라도 놓칠 수가 없었다. 실용회화는 모두가 토익점수와 직결되어 있었고, 토익점수는 앞으로 책정될 그녀의 연봉과 직결되어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Native Speaker의 발음을 천천히 따라했다. 버스의 승객들이 모두 영지를 돌아보았지만, 영지는 굽힘없이 정면을 응시한 채로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담당자 바꿔드리겠습니다. I will connect you to the right person.”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따가운 시선들이 영지에게 닿기도 전에 힘을 잃었다. 영지는 말 그대로 당찼다. 버스가 코너를 돌다 말고 그 우렁찬 목소리에 놀라 슬쩍 브레이크를 걸어봤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흔들리는 손잡이와 흔들리는 사람들. 되감기.

  “누구를 바꿔드릴까요? Whom do you want to speak with?”

  바야흐로, 무한경쟁의 시대다. 월등한 경쟁력만이 내일을 보장할 수 있다. 영지는 이미 그렇게 생겨먹은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학생이지만, 내일은 검정색 고급 세단에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나리라. 영지가 흘러내리는 뿔테를 고쳐 썼다. 흘러내릴 것 같은 이어폰을 매만졌다. No pains, no gains! 사람들의 시선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

  Chapter Three. Try again.


찢겨진 편지

 
  흥분에, 잠을 못 이룰 것 같았던 철민이 거짓말 같이 잠이 들었다. 꿈도, 꾸게 되었다.


  꿈속의 철민은 훈련병이다. 갖은 욕설과 구타, 사소한 모든 것들로부터의 감시에 금방이라도 질식해 버릴 것 같았던 훈련병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그 시절, 철민에게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침마다 배급받는 우유가 얼어있어도, 식판을 세척하고 돌아서는 길에 살얼음이 끼어도, 칼바람에 손끝이 갈라지고, 귀가 찢어지는 것 같아도, 모두 견딜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오로지 여자 때문이었다. 여자 생각에 고된 훈련 속에서도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막말로 해가 떠있는 동안은 아무리 뭣 같고, 더러워도 모든 것들이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들의 연속을 지나 잠자리에 들면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의 얼굴이, 여자의 매끈한 두 다리가 떠올랐다. 군대가 그나마 있을만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밤이 되면 편하게 잠들 수가 있다는 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철민에게는 그런 달콤한 휴식 시간이 오히려 짐이 되고 있었다.

  꿈속의 철민이 훈련 중에 챙긴 손전등을 꺼내고 있다. 그 때부터, 잠들지 않고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자정을 넘기고, 불침번도 교대를 마쳤다. 철민이 모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편지지를 펼쳤다. 어느새 양손에는 볼펜과 손전등이 갖추어져 있다. 손전등을 켜서 입에 문다. 모포 안이 환하다. 천천히 펜을 움직이려는데, 떨리는 필체를 감추지 못해서 첫 줄만 몇 번이고 고쳐서 쓴다. 손전등을 물고 있는 입의 근육이 일그러진다. 철민도 모르게 편지지 위로 무언가가 뚝뚝 떨어진다. 눈물이다. 눈물이 떨어져 편지지 위에 번져서 어렵게 쓴 인사말을 망친다. 눈물을 삼키고, 소리를 죽이는 가운데, 손전등을 물고 있던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어쩔 수 없이 새 편지지를 꺼내려고 가만히 뒤집어쓴 모포를 헤치는데, 바보같이 입에 물고 있던 손전등의 전원을 끄지 않은 채다. 눈앞에는 당직하사 완장을 찬 조교가 어이없다는 듯이 철민을 내려다보고 있다. 공포와 두려움에 어느새 눈물이 말라있다. 얼굴 가득 경악을 떠올리고 있는데, 조교의 앙칼진 목소리가 어두운 내무반을 가른다.

  ‘전원 기상!’

  훈련병들이 순식간에 기상을 하고, 모두들 시계를 보고 어리둥절해 한다. 곧이어 소란을 눈치챈 당직사관이 들어왔고, 그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떨어진다.

  ‘현재 시각은 11시 15분. 앞으로 기상시간 06시 30분전까지 전원 50분 기합에 10분 취침한다!’

  모두들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한다. 다음 순간 당직사관은 내무반에서 사라지고, 거기에 홀로 남은 조교가 작은 음성으로 훈련병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자동, 기상, 깍지 끼고 엎드려뻗쳐, 하나, 둘, 하나, 둘, 자동, 다시 기상, 대가리 박아, 똑바로 박아, 근육에 경련이 올 때까지 버텨, 버텨, 더, 더, 전진, 일어서, 앉아, 어깨동무실시, 일어서, 앉아, 일어서,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계속 흐트러지지? 다시 기상, 좌향좌, 엎드려뻗쳐, 뒷사람 어깨에 다리 걸어, 하나에 취침시간을, 둘에 준수하자, 하나, 둘, 하나, 둘, 목소리가 작아,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훈련병새끼가 미쳐 가지고 어이가 없어, 하나, 하나야, 하나, 올라오지 마, 그러게 깡도 없는 주제에 왜 설치고 그래? 다시 하나, 둘, 기상, 전부 상단 관물대에 다리 걸어 올리고 대가리 박아, 얼마나 버티나 보자.

  철민이 눈을 떴다. 버스는 여전히 대구를 향해 달리고 있다. 철민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는다. 이미 십여 개월이나 지났으면서도 그날에 관한 꿈은 꾸면 꿀수록 더 선명해진다. 이제 버스가 도착하기만 하면, 이 꿈과도 작별할 수가 있으리라. 철민은 품속에서 그 여자가 보내어준 답장을 꺼내든다. 버스가 너무 느려, 철민이 다시 라이터를 꺼내서 매만진다. 파란 불꽃이 피어보기도 전에 사라진다.  


땡순이

 
  꼬박 한 시간이 걸려 학원에 도착한 영지는 곧장 수업을 들었다. 매일 저녁 6시 30분이면 시작되는 어학원이었다. 영지는 그중에서도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이 조금 지나고 있었지만, 영지는 이미 초급반 실력은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 토익을 준비하면서도 제2외국어를 이 정도 수준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편이었다. 모두다 영지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려는 영지를 두고 주변에서는 말이 많았다. 영지의 생김새를 보고 피부트러블이라는 우습지도 않은, 유아적인 발상의 별명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땡순이’라는 별명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땡순이. 땡, 하면 학교에 출근해서 땡, 하면 집에 가고 땡, 하면 학원에 가서 땡, 하면 잠자리에 든다고 해서 땡순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자신에게 그건 어디까지나 시샘의 목소리에 불과한 것일 테지만, 영지라고 해서 항상 초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사실은 영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땡순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점이었다.

  한 번은 수업을 마치고 재빨리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영지의 등 뒤에서 귀에 익지 않은 낯선 목소리가 영지를 붙잡아 세웠었다. 그것도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느긋한 태도로.

  “어이, 땡! 땡순아!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영지는 갑자기 가슴에 불두덩이라도 지져진 것처럼 열이 확 올라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리게 되었다. 헌데, 기가 차게도 상대는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질러놓고는 태평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학과의 학생회장이었다.

  “음, 그래. 다른 게 아니고, 이번에 과 전체 MT 가는데 땡순이 너도 갈 수 있나 해서.”

  여전히 느릿느릿한 말투였고, 자연스럽게 땡순이라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영지는 그 자리에서 그만 견디질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었다.  

  “뭐야? 너 뭐하는 새끼야! 네가 날 알아? 누굴 보고 땡순이라고 그러는 거야? 언제부터 봤다고 반말인거야? 앙!”

  마디마디에 악을 주어 쥐어짜듯이 내지른 소리에 그만 영지의 여드름이 터질 것처럼 붉게 타오르게 되었다. 상대는 말을 잃었고, 멀뚱히 그런 영지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 두터운 뿔테 안경 너머로 영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결국, 건물 복도가 쩡쩡 울릴 정도로 길게 사이렌을 울렸다.

  “으아아아앙!”

  후에, 그 학생회장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를 해보았더니, 그는 눈앞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독이 단단히 올라서 온몸으로 울음을 울던 것만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실로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영지는 정말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로 소리소리 지르며 울어버렸었다. 그것도 여드름 꽃이 활짝 펴서 만발해질 정도로, 크게, 목청을 놓은 채로.

  그런 사건이 있었던 이후로는 사람들이 영지 앞에서 땡순이라는 말을 삼가게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이 직접 듣는 앞에서만 조심하는 편이었다. 영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여전히 땡순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었다. 사실 영지의 실명을 알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드문 편에 속했었다. 영지라고 이런 사람들의 반응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영지는 공부에 전력을 다하여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책상에서 엉덩이만 키우고 있는 것 같아도 영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 이상, 일단 예쁘고 봐야한다는 사실을. 마음이 비단결 같다거나, 살림을 잘한다거나 하는 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애당초 태어나길 독이 잔뜩 오른 두꺼비로 태어났으니 영지에게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있을 수 없는 문제였다. 외모 덕분에 겪는 불친절과 냉대에는 이미 익숙했다. 그래서 영지는 목표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이미 중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한 발 앞서 나아가고 있다.

  그게 영지를 버티게 만드는 힘이었다. 어차피 시간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때가 되면, 같은 출발선에 섰던 경쟁자들과 함께 졸업을 할 것이고, 함께 사회로 나가게 된다. 바로 그 시점이 영지가 벼르고 있는 승부처였다. 세상과의 단판승부. 영지가 쌓아올리고 있는 스펙은 그때를 대비한 하나의 거대하고 굳건한 성채와도 같았다. 그럴 수밖에. 그 성채를 쌓아올리기 위해서 영지는 마음에 생채기가 생길 때마다 새살이 올라오기도 전에 책으로 덮어 마름질을 했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책을 읽는 와중에도 불친절과 냉대를 겪고,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조롱과 멸시, 소외를 견디어야 했고, 때로는 나날이 탄탄해지는 성채 덕에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다시 그 위에 외국어로, 전공 지식으로 촘촘하게 얽어내어 방벽의 틀을 잡아나갔다. 그리고 이제 거의 다 되어가고 있다. 남은 건 시간과 인내로 꾸준히 덧칠을 하며 홈을 메꾸어가는 것이다. 영지는 매일 밤, 두 눈을 감고 그 성채의 망루 위로 올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그려보곤 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대,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든 시대, 그 시대를 함께 살면서 별다른 인맥이나 배경도 없이 오로지 압도적으로 월등한 스펙으로 대기업에 입사한 위풍당당한 자신의 미래를. 그래서 눈을 뜨고 있을 땐, 누구보다 치열하다. 행여나 쌓아올리는 성벽에 균열이라도 생길까 부지런히 공부해 머리를 채우고, 자격증으로 지갑을 채워 넣기 바쁘다. 덕분에 안경알도 그만큼 더 두터워지고 무거워졌다. 이제 더는 그 뭉그러진 콧대로는 안경을 제대로 걸치고 있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영지는 이빨을 더욱 꽉 깨물 뿐이었다. 아, 그래서 몇 달 전까지 교정기도 찼었던가?

  어쨌든 어학용 테이프로 귀를 막고 다녀도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많이도 말고, 피부라도 깨끗했더라면, 시력이라도 좋았더라면, 아님, 눈이라도 조금 더 컸더라면, 콧날이라도 날카롭게 섰더라면, 아님, 곰살갑게 애교라도 부릴 줄 알았더라면, 이 정도로 무시당하는 삶은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이처럼 악착같이 살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걸. 무엇보다 이런 사실을 절대적 진리로 확신하게 된 것에는 옆집 여자의 역할이 컸었다.

  옆집 여자.

  전지현만큼 가늘고 긴 몸매에, 이효리만큼 딱 보기 좋은 볼륨의 인체비율을 지닌, 옆집 여자. 그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옆집 여자, 윤고은.


발신자 부담

 
  이쯤에서, 군대라는 나라를 떠나 남한으로 귀화한 철민의 선임병을 만나 인터뷰했었던 자료화면을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

- 군대에서 김철민 일병의 선임병이셨다고요?

- 네, 그렇습니다.

- 그럼, 같은 소대였습니까?

- 같은 소대뿐만이 아니라, 같은 분대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분대장이었죠. 그러니 김철민에 대해서는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분대장일 때, 가장 신경 써야 했었던 후임병이 바로, 막내였던 김철민이었습니다. 게다가, 녀석은 상당한 고문관이었기 때문에 이미 부대에서 관심병사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 김철민이 고문관? 관심병사였었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죠?

- 뭐,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제가 봤을 땐, 군생활에 적응할 의지가 전혀 없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이등병 시절에 자대에 가서 고참들하고 간부들 이름을 외우는데, 3일이 걸리지 않았어요. 헌데, 사실 뭐 그런 걸 누가 일일이 가르쳐 줘서 외우겠습니까? 그래야 생활이 편하니깐 알아서 외우고 하는 건데, 이 녀석은 한 달이 넘도록 외운 거라고는 중대장 이름하고, 제 이름하고, 자기 동기들 이름이 전부였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이건 대놓고 군 생활하기 싫다고 하는 거였죠. 뭐, 자랑 같은 건 아니지만, 저는 한 달도 안 되어서 간부들 타고 다니는 차종이랑, 번호판까지 다 외웠었어요.  

- 아니, 간부들의 차종과 번호판까지 외울 필요가 있는 겁니까?

- 물론이죠. 위병소에 경계근무 나가면, 반드시 알아야 하죠. 병사들이 차 세운다고, 간부들이 통제를 따릅니까? 그냥, 밟고 지나가죠. 그러니 그 찰나의 순간에 쫄따구들은 누구 차이며, 그 차에 누가 탔으며, 어떤 용무로 출입한 것인지 다 알아내야 하거든요. 당연히 알고 나가야 하는 거예요. 요즘 군대는 그런 거 외우라고 선임병들이 말도 못하게 한다는데, 우스운 거죠.

- 그럼, 김철민은 위병소에 경계근무를 나가지 못했습니까?

- 그건 아니죠. 규율이 있고 하니깐, 일단 근무 투입이 되죠. 그럼, 그 때부터 시작인 거죠. 근무 시간 한 시간 반 동안 갈굼을 당하는 거죠. 선임병하고, 후임병이 같이 위병소에 근무 투입이 되는데, 후임병이 하나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선임병이 다 알아서 해야죠. 선임병 입장에서는 엄청 열이 받죠. 그래서 처음 3주 동안은 부대원들이 아무도 이 녀석하고 근무 나가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 그렇군요. 그럼, 경계근무 태도가 문제가 되어서 관심병사가 된 건가요?

- 아니죠, 그건 아니죠. 경계근무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간부들이 잘 몰라요. 아무래도 초소에 병사 둘밖에 없으니깐. 뭐, 보고해서 간부들한테 알려봤자, 답도 없고 하니깐, 보통은 선임병들이 좀더 고생한다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요. 그래도 김철민이처럼 사태가 보통 사태가 아니다 싶으면, 알아서들 한 시간 반 동안 또 후임병 갈구는 거죠. 여하튼, 김철민은 좀 유별났었어요. 군대에서 튀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는데, 뭐, 지금 생각해봐도 좀 모자란 녀석이었죠.

- 그럼, 김철민이 또 다른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요?

- 물론이죠. 글쎄, 녀석이 남들이 다 일하고 있는 일과업무 시간에도 전화통만 붙잡고 있더라고요. 기가 차지 않겠습니까? 부대에서 최고 어른이라는 간부들도 다 일하거나 훈련받고 있을 그 시간에, 혼자 몰래 빠져나와서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고요. 이건 완전히 미친놈이죠, 미친놈. 그래서 중대장이 김철민이 경계근무 나가있는 동안 병사들 전원 소집해서 정신교육 했었잖아요. 오늘부터 김철민을 관심병사로 두겠다. 아무도 녀석의 행동에 트집을 잡지마라. 수상한 행동을 하면, 즉각 내게 보고할 수 있도록 해라. 참, 기가 찼었죠. 그 상황에서 제가 그 녀석 분대장이니, 꼴도 보기 싫은 중대장이랑 죽치고 앉아서 면담을 하는데… 아휴, 생각하니 또 열받네, 이거.

- 그럼, 관심병사로 지정된 후에는 어떤 조치를 취했었습니까?

- 부대에서 한 거라고는 별로 없었어요. 녀석의 전투복 견장에 노란 딱지를 붙였어요. 노란색 바탕에 검정색 펜으로 스마일마크 그려진 거였는데, 보고 있으면 좀 웃겼죠.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그렇게 노란 딱지 붙이고 있는 게 바로 관심병사라는 증거예요. 괜히 그런 애들은 건들이면 피곤하니깐, 어디를 지나다녀도 선임병들은 다 못 본 척하죠. 그냥, 제가 죽어라 맘 고생한 거죠. 막말로, 그 자식이 자살시도라도 했다가 간부들한테 걸리게 되면, 일단 저부터 영창인데, 이런 제 심정 아시겠어요? 말년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인 거죠. 그래서 제가 그날 당장 김철민이 불러다가 야상의 허리끈 뺏고, 면도기 뺏고, 전투화 끈도 여분을 뺏고, 여하튼, 자살시도 따윈 생각조차 못하게 아주 원천봉쇄를 했었죠. 그래도 맘이 안 놓여서 작업도 김철민이 데리고 제가 직접 나가서 삽질했었고, 철민이한테는 작업도구도 안줬어요. 그냥 제가 하는 걸 보기나 하라고 했죠. 뭐, 칼이나 가위 같은 용품들도 제 허락 없이는 쓰지도 못하게 했었어요.

- 그렇군요. 음, 말씀 중에 김철민 일병이 전화통만 붙잡고 살았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에 그렇게 전화를 하려고 했었던 거죠?

- 뭐, 그야 뻔하죠. 여자 아니겠어요, 여자. 물어보나마나죠.

- 그럼, 분대장이셨다고 하시니깐, 김철민 일병하고 상담 같은 것도 해주고 했었나요?

- 몇 차례 했었죠. 그렇지 않아도 전화에 계속 집착하니깐, 제가 알려줬었죠. 여자가 변심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남은 군생활이 힘들다. 지금 전화도 수신제한을 걸어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전화를 안 받을 리가 없다. 그리고 여긴 계급사회이기 전에, 단체생활이 기본적으로 되어주어야만 하는 곳이다. 너 혼자의 감성으로 단체를 어지럽히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이미 너 솔직히 누가 상대나 해주냐? 뭐, 그런 이야기들 자주해 주고는 했었죠.

- 그랬더니 변화를 보이던가요?

- 솔직히 말 몇 마디 한다고 그게 정리가 됩니까? 녀석은 제가 이빨 깐 것 중에 다른 건 다 걸러내고, 수신제한 걸어뒀을지도 모른다는 말만 기억하던 걸요. 그래서는 글쎄, 전화를 수신자부담으로 걸기 시작하더라고요.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다르게 찍히게 해보려고, 제 깜냥에는 용을 쓴 거죠. 08217, 1541, 1566, KT카드 등등 헌데, 그게 그런다고 되나요. 여자들도 군바리들이 쓰는 수신자 부담이 어떤 건지 다 아는데. 나중에는 간부 휴대폰도 빌려달라고 해서 또 문제가 되기도 했었죠.  

- 그럼, 결국, 포기하던가요?

- 포기요? 아직 그 자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시나 보네요. 그랬더니 전화에서 편지로 전향합디다. 틈만 나면, 편지를 쓰던 걸요. 기본적인 개념이고, 뭐고, 그런 것도 없었어요. 개인정비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였어요. 씻지도 않으려고 해, 먹지도 않으려고 해, 이발도 싫어, 손톱도 안 깎아, 빨래도 싫어, 대체 단체생활에서 기본적인 틀이 안 되먹은 거죠.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 시간들을 몽땅 편지 하나만 쓰려고 덤벼드니 나중엔 무서워지기까지 했어요.

- 일단 그 여자를 대단히 사랑하긴 했나보군요. 좀 궁금해집니다. 여자문제로 짐작은 하셨다고 했는데, 혹시 그 여자와 따로 어떤 사연이 있거나 한 건 들어보신 적이 없으신 겁니까?

- 저도 사람인데, 궁금하기야 궁금했죠. 저렇게 목을 매는 걸 보니까 대체 얼마나 예쁜 여자일까? 그 여자랑 진도가 어디까지 나간 걸까? 하, 참, 저도 이런 건 말하기 좀 쪽팔려서 넘어가려 했던 건데… 솔직히 그래서 따로 상담한답시고 담배 한 대 같이 태우면서 진지하게 물어본 적도 있어요. 늘 전화하고 편지 쓰던데, 여자문제 맞느냐? 대체 그 여자와 무슨 사이냐? 아니, 너 하는 짓을 보니 사귀는 사이 같은데 아니냐? 이상하게 듣지만 말고 솔직하게 서로 이야기해보자. 그 여자와 그래서 잠이라도 잤냐? 잤는데, 고무신 거꾸로 신었다고 그러냐? 그래서 그런 거라면, 생각을 잘못한 거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냐? 여자가 남자들 몇 명하고 자고 다니는 게 어디 흉이라도 되는 세상이냐? 인생 길고 긴데, 너 그러다 여기서 짜부라진다. 그랬더니 글쎄, 그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이가 없어서… 글쎄, 말년병장이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서 맞대면으로 진솔하게 먼저 이야기를 해보자는데, 단 한 마디도 않더군요. 무려 한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 네, 잘 알겠습니다. 많은 도움이 된 듯합니다.

- 히야, 그런데, 그런 녀석이 벌써 일병 정기휴가를 나간다고요? 정말, 군대가 좋긴 좋죠. 그런 고문관도 결국 진급해서 후임병들 거느리고 다닐 수도 있고. 어떤가요? 그 자식도 이젠 적응을 좀 했나요?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확실히 수신자 부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발신자 부담이었다.


쌓여가는 편지

 
  학원을 마친 영지가 곧장 자취방으로 향했다. 하루 중 가장 짜증나는 시간이 바로 이 때다. 시간표에 맞춰서 정해진 시간대로 행동하는 영지와는 달리 옆집의 윤고은은 멋대로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차라리 둘 모두 시간을 맞춰서 다니는 입장이라면, 영지는 일부러 걸음을 늦춰서라도 윤고은과 마주치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지만, 윤고은은 말 그대로 제멋대로였다. 그때쯤 해서 귀가를 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마주쳐도 윤고은만 마주친다면, 기분이 덜 상할 수도 있겠지만, 윤고은을 마주치는 날은 어김없이 윤고은을 집 앞까지 승용차로 모셔다주는 덜 떨어진 짐승들도 마주쳐야 했다. 영지에겐 한 마디로, 염병할, 정도의 상황이 종종 벌어졌었던 것이다.

  염병들 하네.

  아니나 다를까, 원룸 앞에 이르렀을 때, 영지는 또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외제 승용차였다. 거기서 문이 열리고, 윤고은과 남자가 내려서고 있었다. 종종 봤었던 풍경이지만, 어떻게 매번 함께 내리는 남자의 얼굴이 달랐고, 차가 달랐다. 그 사실에 또 화가 치밀었다. 기가 찼다. 대체 한눈에 봐도 머리가 텅텅 비어 보이는 저 계집애가 뭐가 볼 것이 있다고 남자들이 사족을 못 쓰는 것일까? 작별인사를 하고, 남자가 사라졌다. 윤고은은 마음에도 없으면서 남자의 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 그 동안 영지는 다시 한 번, 찬찬히 관찰을 해봤다. 몸매가 늘씬하다는 건 일단 인정했다. 그렇지만, 화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떡칠이었고, 하루 동안 화장에 투자하는 시간만 해도 아마 회화 테이프를 몇 번은 들을 수 있을 시간이었다. 걸음걸이도 맘에 들지 않았다. 뒤에서 보고 있자면, 저절로 엉덩이가 흔들릴 정도로 과도하게 높은 굽의 힐을 신고 있어서 천박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저 명품 가방은 또 어떤가? 아마 그걸 살 돈으로 머리에 책을 집어넣었다면, 자격증 수 십 개는 따지 않았을까?

  영지는 윤고은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윤고은. 어느 과인지도 모르고, 몇 학년인지, 몇 살인지도 모르는 여자였다. 저 계집애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두 달 전이었다. 원룸으로 들어서면서 우체통을 보았더니 고지서가 있었다. 매달 잊지 않고 찾아오는 세금고지서에 짜증이 확 밀려오는데, 옆집의 우체통을 보았더니 텅 비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옆집 여자는 미리미리 세금을 처리하는 참 현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눈을 돌리는데, 우체통 밑에 편지가 한 아름이나 쌓여있는 것이었다. 받는 이의 주소를 보았더니 바로 옆집이었고, 그때 발견한 이름이 바로 윤고은이었다. 보낸 이는 군인이었다. 강원도 강릉으로 시작하는 군부대의 주소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이 많은 편지를 군인 한명이 보냈다는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편지는 모두 그 군인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영지의 머릿속에 몇 가지 이미지가 스쳐지나갔다. 허리춤까지 쌓인 눈과 얼룩무늬 군복, 까맣게 탄 피부를 드러낸 채 축구공을 차는 모습. 영지가 군대에 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날부터 영지는 옆집 여자를 의식하게 되었다. 늘 화장을 짙게 하는 여자. 고급 향수를 뿌리고, 명품 가방을 들고, 남자들의 차를 얻어 타고 학교로 출근하는 여자. 몸매가 늘씬한 그 여자. 쌓여가는 편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영지는 그런 윤고은을 보면서 괜히 열을 올렸다. 옆집 여자도 자신처럼 고작 대학생이다. 그러나 어울리지도 않으면서 명품가방을 들어야만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는 불쌍한 여자다. 옆집 여자는 분명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그러나 본인의 힘만으로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곧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입장이 갈리게 될 테니까. 영지는 바득바득 이를 갈며, 머릿속 절구통에 옆집 여자를 넣고서는 고운가루가 될 때까지 짓찧어 빻아댈 뿐이었다.

  그런 영지에게 문제가 생긴 건 최근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우체통을 보는 순간이면, 늘 가슴 한 편이 짠해지는 것이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으면, 다시 힘찬 하루를 시작했다가도 밤이 깊어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아무도 없을 자취방의 문을 열기가 싫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한숨도 깊어져 가고 있는 영지였다. 그런 영지를 안아주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잠자리에 누워서 별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저 멀리 강원도에서 편지를 보내고 있는 군인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날도 걸음을 옮기다 우체통에 눈이 머물렀었다. 영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쪽에 쌓여있는 편지들이 보였다. 어떤 결심이 선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영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영지의 심장소리만이 귓가에 크게 울리고 있었다. 영지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편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고막을 찢어놓을 것 같이 쿵쾅거리던 영지의 심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영지가 재빨리 자취방으로 뛰어올라가 문을 열었다.


만남

 
  버스가 멈춘다. 철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튀어나간다. 승차권을 버스기사에게 넘기고, 내려서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한 모금 길게. 담배연기를 내뱉는다. 허공으로 피어오르려던 담배연기가 그만 흩어져 내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담배는 태우지 않았는데. 침샘에 니코틴이 들러붙으며, 철민이 처음으로 담배를 태웠던 날의 기억을 뱉어내게 만든다.

  그만해. 넌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

  어렵사리 붙잡아서 죽을 만큼 절절하게 사랑을 고백했건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짧았고, 차가웠다. 그래서 거절을 당했는지조차 모르고 하던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짧았던 대답만큼이나 가뿐하게 여자는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뒤였다. 덕분에 술에게 잡아먹혀 태웠다던 첫 담배의 맛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얼핏 설핏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골목골목을 돌 때마다 주차된 차들을 걷어차고, 전봇대의 허리춤을 끌어안고, 우당탕 쓰레기봉투 위로 까무러치던 스스로의 그림자뿐이다. 지지직. 군홧발로 태우던 담배를 비벼 끈다. 뭐, 이제는 그것도 추억이 되려나? 철민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플랫폼을 벗어난다.

  영지가 터미널 입구에서 시계를 확인한다. 이제 곧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다. 품에서 편지를 꺼내어 다시 한 번 읽어본다.


200X년 8월 00일.

드디어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너를 만나야만 한다. 만나서 물어보아야만 한다. 왜, 날 피하는 것인지, 아니, 이렇게 피할 것이었다면, 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인지를.

아니, 사실은 이런 구차한 질문들에 앞서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위병소 철책 밖으로 일렬로 하얗게 늘어선 목련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저 목련 꽃잎들이 어떻게 춤을 추며 바닥으로 지는지를. 그리고 그 한 잎, 한 잎이 마치 네가 날 부르는 손짓 같아 얼마나 어지러웠는지, 그 아찔한 현기증 아래에서는 네 이름과, 네 얼굴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음을!

그러면서도 참 모를 일이다. 그 아찔함의 끝에서는 왜 매번 네게 붙이지도 못하고 눈앞에서 찢겨진 편지가 생각났던 것일까? 갈기갈기 찢어져서 내 눈앞에서 흩날리던 그 파편들이 연상된 건 순전히 떨어지던 목련 꽃잎들이 땅에 닿기도 전에 휘날리던 그 모양새 때문에 그런 것이었을까?

뭐, 이젠 어쨌든 좋다. 이젠 정말 몇 시간이 남지 않았다. 잠을 자는 시간도 아깝지만, 잠을 자야만 이 지루한 시간을 줄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야 붙이지도 못하고 찢겨졌었던 그 편지의 내용들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고 이야기해 줄 수 있으리라. 위병소 철책 너머에서 미치도록 널 그리워하게 만들었던 그 하얀 목련에 대해서도. 탄약고를 노랗게 물들인 개나리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그 색색의 현란함 앞에서 끊임없이 떠오른 첫 번째 단어가 너의 이름이란 사실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전해주고 싶다!

자칫, 한 단어라도 잊어버리기 전에. 지금. 바로, 지금….


  영지의 머릿속으로 노란 개나리와 하얀 목련이 피었다지고, 그 뒤에서 떡 벌어진 어깨의 군인이 걸어온다. 전투모를 벗어 영지를 바라보는 눈은 우수에 차 있다. 가슴이 떨린다. 영지는 이미 우체통 밑에 쌓여있던 그 편지들을 모두 읽은 후였다. 윤고은에게 들키지 않게, 하루에 한 통씩, 남몰래 편지를 읽으며, 윤고은이 만나고 다니는 덜 떨어진 짐승들과는 전혀 다른, 우수에 찬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로맨티시스트를 떠올렸다. 은밀한 나날. 편지봉투가 하나씩 배를 벌릴 때마다 영지의 머릿속 군인은 그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이토록 섬세한 감성이라니. 그는 또래의 여느 남자들과는 달리 사람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리라. 그러자 군인의 검게 그을린 근육도 더욱 탄탄해지는 듯 했다. 이럴 때 연예인 누군가가 떠오른다는 것이 마냥 부끄럽다. 영지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검붉게 익어간다. 결국, 마지막으로 온 편지를 읽고 나서는 윤고은의 이름으로 답장을 쓰게 되었다.

  핸드백을 열어 콤팩트를 꺼낸다. 버스터미널에서 철민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아무래도 거울에 비친 모습에 자신이 없다. 처음 만나는 철민에게 그 편지를 자신이 썼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님, 머리가 텅 빈 윤고은 따위가 당신의 편지를 손도 대지 않고 버려두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차라리 그 편지를 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을 해버릴까? 아님, 이것저것 풀어서 이야기하기 전에 지갑에 빼곡하게 꽂아둔 각종 자격증과 회화실력을 선보이는 것이 현실적일까?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세운 붉은 여드름 위에 두어 번 더 파우더를 칠해 본다. 태어나 처음 껴보는 서클렌즈의 푸른 빛깔이 어색하기만 하다.

  멀리서 얼룩무늬 군복이 보인다. 멀어서 그런지 키가 작아 보인다. 아니다, 상대적으로 얼굴은 또 커 보인다. 영지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젖힌다. 군인이 걸음을 멈추고 전투모를 벗어 주변을 둘러본다. 설마, 윤고은을 찾고 있는 것일까? 설마! 영지가 고개를 바로 세우며, 조심스레 군인에게 다가선다. 군인이 영지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영지도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본다. 얼굴 전면에 여드름 꽃이 활짝 피어 있다. 게다가 여름햇살에 그대로 타버린 시커먼 얼굴이다. 그러면서도 큼지막한 눈알은 당장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다닐 것 같다. 영지가 군인의 시선을 외면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어디에도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영지의 뒷목이 서늘하다. 다시 걸음을 돌려 군인의 군복에 적힌 이름을 곁눈질로 확인한다. 갑자기 현기증이 오월의 장미마냥 만개하여 활짝 피어오른다.

  ‘일병 김철민.’
 
  재빠른 걸음으로 택시에 올라탄 영지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맙소사!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남은 로맨티시스트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두꺼비라니! 간절한 마음을 구절구절 아름답고 유려하게 펼쳐 보이던 로맨티시스트가 두꺼비였다니!


Chapter Three. Try again

 
  김철민, 말이 필요 없다. 9박 10일의 정기휴가 동안 윤고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술만 마신다.

  윤고은, 철민의 첫 편지가 오던 날. 경악에 찬 얼굴로 바로, 이삿짐을 꾸렸다. 이 여자의 행방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옆집 여자, 이사를 온 이후로 줄기차게 날아드는 낯선 이름의 편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다. 어장관리를 하며 팔자 한 번 바꿔볼 계획을 세우는 것이 삶의 낙이다.

  서영지, No pains, no gains. 땡순이 오늘도 바쁘다. 버스에서 어학용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큰소리로 따라한다.

  Chapter Three. Try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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